일반 아파트와 별 차이 없이 도리어 더 세심하게 지어졌고, 어차피 아파트 생활이란 게 내 공간에서의 개인적인 삶인데 뭐가 문제일까라는 생각은 실버아파트에 대한 나의 몰지각이며 실례였다.
실버아파트는 다른 세계였다. 실버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그냥 노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산다는 것 이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예습이 필요한 일이었다.
난 아무런 준비도 생각도 없이 덜컥 실버의 세계로 들어와 버렸다. 그렇게 좌충우돌, 고군분투의 삶은 시작되었다. 매우 조용히. p 18-19
김순옥 에세이 <초보 노인입니다>는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한 원작 <나는 실버아파트에 산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김순옥 작가는 1957년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나 2006년까지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고 한다. 1여 1남을 두었고, 은퇴 후 남편과 함께 늙어 가고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은퇴 후 얼떨결에 실버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저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실버아파트의 관찰기를 유쾌하게 써 내려갔다. 실버아파트에서 만나는 노인들의 이야기와 자신의 실버기 입문기를 함께 보여준다.
아직 노인이 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저자는 결국 2년 8개월의 실버아파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그곳을 떠나게 된다. "실버들, 특히 초보 실버기에 들어선 이들이 나처럼 당황하지 않길. 끝까지 담담하며 당당하기를."이라는 말을 전하면서.
초보 노인입니다
- 지은이: 김순옥
- 펴낸곳: (주)민음사
- 1판 1쇄 펴냄: 2023년 7월 14일
<초보 노인입니다>, 책 속의 문장들
혼자 남겨지는 것은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 같은 것일 텐데 그걸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엔 그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많은 노인들이 있다. 막상 문제 앞에 서면 앞집처럼, 혹은 다른 다섯 할머니들처럼 그렇게 살아지는 것일까. 그렇겠지. 아마 그렇게 살아지겠지. p 45
나의 현재를 예쁘고 젊다고 봐 준 노인들은 분명히 나의 시간을 지나간 분들이다. 그분들이 굳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늙음을 앞당기지 말라는 사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사인을 알아차려야 하지 않을까. 내일은 예쁘게 꾸미고 식당 앞에서 고운 할머니를 기다려 봐야 할 모양이다. p 125
은퇴 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나는 한두 벌의 옷과 신발로 각 계절을 잘 살아냈다. 초상집에 가는 데 필요한 검정색 옷이 여름용, 겨울용 한 벌씩 있으면 충분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있는 것도 버거웠다. (~) "매일 뭔가 조금씩 버리다 보니까 죽음을 준비하는 기분이야." p 142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상당히 괜찮은 일이었다. 죽음을 기뻐할 것까진 아니어도 슬퍼할 일도 아니라는 것. 죽음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접근해 간다는 것과, 나름 계획까지 세워 볼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나를 죽게 하라'고도 할 수 있는 것. 물론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죽음인 것은 알지만. 하여간. p 163
우리는 모두 은퇴한 이후의 삶을 살고 있었고, 그 삶 또한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대개는 한두 가지의 질병에 시달리고, 간간이 찾아오는 우울과 불면에 힘든 하루를 보내며, 직장을 은퇴하고 아이들이 독립한 후 내 존재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가끔씩 절망하기도 하다가 또 스스로 위로해 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p 195
책을 읽고 난 후, 나의 생각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미래 모습을 당겨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 역시도 점점 나의 방식대로 내 삶을 견뎌 내고 있는 나이가 되었다. 다만 그 가운데 한 가지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조금 더 지혜롭고 현명하게 나이 들어가고 싶을 뿐이다.
꽤 오래전부터 남편과 나는 자주 은퇴 후의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지낼 것인가에 대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그 설렘이 느껴져 함께 웃으면서 즐거워한다. 그리고는 곧 다시 새로운 꿈을 꾸며 며칠 전에 쌓았던 성을 부시고는 또 다른 그림을 스케치하며 신나 한다.
우리들의 인생 3막에서는 좋아하는 해외의 도시를 돌며 한 달 살기도 하고 있고, 캠핑카를 마련하여 전국일주를 하기도 하며, 시골에 소박한 집을 짓고는 텃밭을 가꾸기도 하며, 남편이 잘 만드는 잔치국수로 봉사를 하기도 하며, 살아가면서 인연을 맺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모두 맛있는 밥을 한 번씩 사고, 작은 카페를 빌려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우리들만의 콘서트가 펼쳐지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그림들은 남편과 내가 퇴근 후에 소파에 앉아 멋지게 밑그림을 그렸다가는 다시 지워버리고, 또 다른 색연필로 색칠을 하고는 또 그다음 날에는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를 찍는, 남들이 보면 "저렇게 놀 수도 있구나" 하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게 할지도 모르겠는 행동들이 우리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되었다.
사실 남편의 계획에는 없었지만, 내가 요즘 부쩍 관심을 갖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실버타운이었다. 몇 년 전에 <더클래식 500>과 <삼성 노블카운티>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그곳에서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그 생각이 거짓말처럼 아무런 미련 없이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
대신 오늘을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니까. 그것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중요하게 여길 만한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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