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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하루키의 오래된 꿈 그 상상력의 결정체

난짬뽕 2023. 12. 1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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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 옮긴이: 홍은주
  • 1판 1쇄 2023년 9월 6일
  • 펴낸곳: (주)문학동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뿜어내는 상상력의 결정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로, 지난 9월에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다. 1부, 2부, 3부의 목차로 구성된 이 책은 760페이지가 넘는 꽤 두꺼운 책이다. 지난주 퇴근해서 월요일 밤부터 읽기 시작하여 엊그제 목요일 새벽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책장을 넘겼다. 자꾸만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쉽게 책을 덮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마음속 깊이 간직된 비밀이 뿜어내는 상상력의 결정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생각과 세계관, 그와 함께했던 다양한 분야의 책과 작가들, 클래식과 재즈 음악, 영화와 정신분석학 등 작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다방면의 지식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전개가 흥미로웠고,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가운데 펼쳐놓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끝맺을까 하는 궁금증에 책을 읽으면서도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왜 좋아하는지 알겠어.'라는 결론이었다.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잃는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p 356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네, 이해하시겠습니까?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네, 저는 옛날부터 이 말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만, 그 의미를 진심으로 이해한 건 죽어서 이런 몸이 되고 나서였습니다. 그래요, 우리 인간은 그저 숨결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어버린 제게는 이미 그림자조차 달려 있지 않습니다."  p 359

 

마음속 깊은 곳, 작은 방에 들어가 너의 기억을 더듬는다

우리나라에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대부분의 열혈 독자층들은 그의 작품들을 빼놓지 않고 읽거나 모으는 것을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만약 혹시라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접하지 못했다면, 나는 그의 많은 책 가운데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먼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입문서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문장 사이사이에서 또 다른 작가들과 그들의 책이 떠오르는가 싶다가는 밤을 녹일 것 같은 음악이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농밀한 침묵 속에서 먹음직스러운 음식 향이 풍기기도 한다. 그래서 책은 두껍지만 지루할 틈이 생기지 않는다.

에롤 가너, 알렉산드르 보로딘, 제리 멀리건, 콜 포터, 안토니오 비발디, 비틀스에 이르기까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음악가들은 또 다른 조연들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비롯하여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호메로스, 이언 플레밍,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 하루키가 등장인물들을 통해 언급했던 많은 작가들도 보너스로 만날 수 있다. 

"믿는 겁니다."

"무엇을 믿는데?"

"누군가가 땅에서 당신을 받아주리란 것을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겁니다. 보류하지 않고, 온전히, 무조건적으로."  p 744

 

70대의 작가가 30대의 청년을 바라보며

많은 문예지에 발표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들은 책이 되어 우리들에게 소개되었는데, 유일하게 출간되지 않은 소설이 있었다. 그 작품은 바로 1980년 문예지 <<문학계>>에 발표한 중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었다고 한다. 하루키는 내용 면에서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랬다고는 했지만, 그는 이 작품에 대해 "무언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처음부터 그렇게 느껴왔다"라고 소회 했다. 

언젠가 적절한 시기가 오면 천천히 손보아 고쳐 써볼 생각으로 그대로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는 이 작품은 두 가지 스토리를 병행해 교대로 진행시키며 마지막에 하나로 합쳐진다는 하루키의 구상대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대응을 떠올렸고, 송두리째 고쳐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2020년 초부터 새로운 형태로 다듬어 쓰기 시작하여 삼 년간의 시간 끝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완성했다. 30대의 젊은 하루키가 쓴 글을 70대의 연륜 있는 작가 하루키에 의해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청년 시절 발표했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줄곧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고 작가후기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게 43년간 목에 걸려 있던 가시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통해 시원하게 빼내버릴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내 의식과 내 마음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내 마음은 어떤 때는 봄날의 들판에서 뛰노는 어린 토끼이고, 또 어떤 때는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가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렇다,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다.  p 754

 

오래된 꿈들의 잔향을 찾아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마음에 품고 있던 오래된 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곧 책을 읽는 나의 꿈과 우리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고야스와 서브마린 소년은 곧 하루키 자신일 수도, 우리들 모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소설을 바라보게 된다. 

그림자를 잃은 사람과 사람을 잃은 그림자. 나의 그림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와 그림자 사이에 벽이 가로막고 있다.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무수히 많은 벽들. 그것은 현실적인 문제일 수도, 마음의 장벽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깥세계로 나갈 수도 없고, 도시로 들어올 수도 없는 우리들 자신에게 세워져 있는 보이지 않는 벽과 때로는 점점 옅어가는 나의 그림자에 대해 생각해 본다. 

벽은 말했다. 너희는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 설령 하나를 통과하더라도 그 너머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 무슨 짓을 하든 결과는 똑같아. 

"듣지 마요." 그림자가 말했다. "두려워해선 안 돼요. 앞을 향해 달리는 겁니다. 의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믿고."

그래, 달리거라, 벽이 말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얼마든지 멀리 달려가려무냐. 나는 언제나 거기 있을 테니.  p 206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p 684

어쩌면 그곳에 우리들의 오래된 꿈들이 작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기억의 비밀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은 것은 내게 큰 선물이 되었다. 그런데 책 제목에서 컴머(,)의 의미는 무엇일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사이 많은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너에게 소중한 것을. 그래도 포기하지 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도시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까."  p 15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 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 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  p  452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줄거리

에세이 대회에서 만나 서로 좋아하게 된 열일곱 살 나와 열여섯 살 너. 소녀는 어느 날 자신이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 안이고, 이곳의 나는 그림자일 뿐이라는 말을 한다. 나는 그 도시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게 되고, 갑지가 소녀가 사라진다. 소녀를 찾아 나도 이야기 속의 도시로 향한다. 

그 도시에서 소녀를 만나지만, 소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시계에 바늘이 없는 그 도시에는 도서관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의 꿈이 달걀 모양으로 줄지어 서고에 놓여 있다. 나는 그 꿈들을 읽는 일을 맡는다. 도시에 들어오기 위해 자신의 그림자를 버린 나. 

현실 세계에서의 나는 도쿄를 떠나 외딴 시골 도서관의 관장이 된다. 전 도서관장 고야스 씨와 엘로 서브마린 요트파카를 입은 소년, 역 근처의 작은 카페 여주인과의 일상. 그러던 어느 날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도시의 지도를 건넨다. 하나의 자립한 도서관이 될 수 있는 소년은 나를 매개체로 하여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도시 안에서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만난 나. 소년에게 꿈 읽는 이의 직책을 물려주고, 나는 마음의 길을 따라 현실로 돌아와 그림자와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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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책 속의 문장들

우리는 연인 사이였을까? 간단하게 그런 이름을 붙여도 될까? 나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나와 너는 적어도 그 시기, 일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티 없이 순수하게 한데 맺고 있었다. 이윽고 둘만의 특별한 비밀 세계를 만들어내고 함께 나누게 되었다 - 높은 벽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도시를.  p 33

너는 여러 가지를 숨기지 않고 스스럼없이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내 생각에, 이 세계에서 마음속에 비밀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사람이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을까?  p 44

"한편으로는 누구나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지. 내 안에도 있고, 자네 안에도 있어. 그럼에도 역시,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광경이라네. 그렇기에 우리는 태반이 눈을 감은 채로 인생을 보내는 셈이고."  p 102

"네 것이 되고 싶어." 너는 속삭이듯 말한다.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 싶어."  p 110

"만약 그렇다면, 다시 말해 네가 누군가의 그림자일 뿐이라면, 너의 실체는 어디 있을까?"  p 111

그림자는 말했다. "당신이 인생에서 무얼 추구할지는 당신 소관이죠. 누가 뭐래도 당신 인생이니까요. 나는 그저 부속물일 뿐이에요. 훌륭한 지혜를 가진 것도 아니고 현실에서도 거의 쓸모가 없죠. 그래도 말입니다. 내가 아예 없어지면 나름대로 불편한 점이 있을걸요. 잘난 체하고 싶진 않지만, 나도 지금껏 아무 이유 없이 당신과 함께 행동해온 게 아니라고요."  p 125

그림자의 말마따나 이 도시는 가짜 이야기로 가득할지도 모르고, 구성은 모순투성이일지도 모른다. 그건 결국 나와 너 둘이서 여름 한 철을 들여 만든 상상 속 가상의 도시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도시는 실제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는 이미 우리 손을 떠나 독자적으로 성장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그 힘을 나는 제어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 누구도 할 수 없다.  p 151

"오래된 꿈이란, 이 도시가 성립하기 위해 벽 바깥으로 추방당한 본체가 남겨놓은 마음의 잔향 같은 것 아닐까요. 본체를 추방하더라도 송두리째 모조리 들어낼 순 없고, 아무래도 뒤에 남는 게 있어요. 그 잔재들을 모아 오래된 꿈이라는 특별한 용기에 단단히 가둔 겁니다."  p 177~178

"마음의 씨앗?" "그래요. 사람이 품은 갖가지 종류의 감정이죠.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회의, 자기연민~~~ 그리고 꿈, 사랑. 이 도시에서 그런 감정은 무용한 것, 오히려 해로운 것이죠. 이른바 역병의 씨앗 같은 겁니다."  p 178

"도시는 이 웅덩이 주위에 공포라는 심리적 울타리를 엄중하게 둘러쳐뒀지요. 담이나 울타리보다 훨씬 효과적이에요. 한번 공포가 마음에 뿌리내리면 그걸 극복하기란 간단하지 않으니까."  p 210

"나는 내 그림자가 아무래도 신경쓰여. 특히 최근 들어서. 자기 그림자에 대해 인간으로서 져야 할 책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과연 나는 내 그림자를 지금껏 정당하게, 공정하게 대해왔을지."  p 247~248

"그도 그럴 게 여긴 평범한 도서관이 아니니까요. 그저 많은 책을 모아둔 공공시설이 아닙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장소여야 합니다."  p 451

"당신은 인생의 아주 이른 단계에서 최고의 상대를 만났던 겁니다. 만나버렸다, 라고 해야 할까요."  p 579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p 696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1982년 <양을 쫓는 모험>으로 노마문예신인상, 1985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했다. 2006년 프란츠 카프카 상, 2009년 예루살렘 상, 2016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기사단장 죽이기> <여자 없는 남자들> <일인칭 단수>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외 수많은 소설과 에세이로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옮긴이 홍은주

이화여자대학교 불어교육학과와 동 대학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일본에 거주하며 일본어와 프랑스어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 <일인칭 단수> <기사단장 죽이기> <눈의 무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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