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말하는, 영화 <피아니스트>
영화 <피아니스트>의 첫 도입부인 폴란드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독일의 폭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연주되는 녹턴 20번은 전쟁이 끝나고 주인공이 다시 그 장소에서 생방송으로 연주하는 곡이기도 하다.
피아노 연주가 흐르는 가운데, 아무런 대사 없이 만감이 교차하는 주인공의 표정은 영화를 보고 있는 나의 마음까지 먹먹하게 만들어버렸다. 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 공포와 두려움 등이 모두 그의 얼굴 안에서 한꺼번에 비쳤기 때문이다.
2002년에 만들어진 <피아니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존 피아니스트가 실제로 겪었던 전쟁의 비극과 생존의 고비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실화 속 인물은 바로 그 유명한 폴란드 태생의 유대계 피아니스트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이다.
피아니스트(The Pianist)
감독: 로만 폴란스키
원작: 브와디스와프 스필만
제작: 프랑스, 영국, 독일, 폴란드
출연: 애드리언 브로디(브와디스와프 슈필만 역), 토마스 크레취만(빌름 호젠펠트 역)
음악: 보이체크 킬라
수상
2003년 제75회 아카데미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
2003년 제28회 세자르 영화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촬영상, 음악상, 프로덕션 디자인상, 음향상
2002년 제55회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2002년 제56회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2002년 제37회 전미 비평가 협회 작품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각본상
영화 <피아니스트> 줄거리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는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유명한 유대계 피아니스트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은 쇼팽의 녹턴을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를 하는 중에 간간이 폭격 소리가 들리고, 결국에는 방송국에 폭탄이 떨어진 후 상황이 급변하여 바르샤바가 독일군에게 넘어간다.
그로부터 시작된 홀로코스트. 곧 유대인 거주 지역인 게토가 만들어지고, 그들의 잔인한 말살 정책이 시작된다. 슈필만 역시 가족을 잃은 채 가까스로 홀로 살아남는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피하게 되지만,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죽음의 위협에서 간신히 목숨만 건진 슈필만은 유령 같은 도시의 폐허가 된 빈 건물에 혼자 숨어 지내게 된다.
허기와 추위, 공포와 외로움 속에서 그저 생을 연명하던 슈필만은 오래된 통조림을 발견하고 뚜껑을 따려다가 그만 인기척을 내게 되어 독일군 장교와 마주친다. 유대인 도망자임을 눈치챈 독일 장교는 슈필만에게 누구냐고 물었고, 겁에 질린 슈필만이 피아니스트라고 말하자, 옆방에 있는 피아노를 가리키며 연주해 보라고 말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어쩌면 마지막 연주가 될지도 모르는 그 순간에, 슈필만은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한다. 목숨을 담보로 연주된 그 곡을 들으면서 독일 장교는 감동을 받는다. 연주가 끝난 후 그는 슈필만의 목숨을 살려주었고, 지속해서 슈필만에게 먹을 것과 옷 등을 갖다 준다. 그리고 전쟁 상황이 바뀌어 독일군이 퇴각하는 날,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까지 벗어준 채 폴란드 땅을 떠난다.
전쟁이 끝난 후 슈필만은 다시 연주생활을 시작한다. 동료로부터 자신을 살려준 장교가 연합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용소로 그를 찾아 나섰지만, 이미 독일 포로들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어 독일 장교를 만나지는 못한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슈필만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최연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애드리언 브로디
이 영화는 슈필만의 자서전인 <도시의 죽음>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11년 바이올리니스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슈필만은 바르샤바 음악원과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다. 바르샤바로 돌아와 피아니스트로서 유명했던 슈필만은 동시에 작곡가로도 활동했다.
영화에서도 보여주고 있듯이,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전쟁 초기에는 게토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을 했지만 나중에는 일반 노동자로 일해야만 했다. 실제로 3년 넘게 은신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그 공포와 외로움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슈필만을 연기한 배우는 애드리언 브로디인데, 젊은 시절 슈필만의 사진과 비교해 보니 왠지 모르게 많이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신문 공고를 통해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는데, 슈필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6주간 14kg을 빼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연기에 대한 진정성은 영화를 통해서 고스란히 전해받을 수 있었는데, 서른 살이라는 최연소 나이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인간 본성을 말하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독일군에 의해 유대인 거주 지역인 게토가 만들어지고, 인간의 잔인함이 어디까지 극에 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그려낸다. 카페와 공원에도 유대인은 출입할 수 없었고, 인도로도 걸을 수 없어 차가 다니는 도로로 내려가 걷게 했다.
갑자기 유대인 가정을 쳐들어가 저녁을 먹고 있는 가족들에게 모두 일어서라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는 휠체어에 탄 노인을 창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한다. 도망가는 여성을 향해 총을 쏴 다리가 꺾인 채 앉은 자세로 죽은 모습, 총격 후 살아 있는 사람 위로 차가 지나가는 장면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불태우는 장면은 정말로 머릿속을 뿌연 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같은 유대인끼리 길에서 서로의 음식을 빼앗고, 그 싸움 끝에 땅에 흘린 수프를 훑어 먹는 장면도 놀라웠고, 주인공 또한 쫓기다가 독일인 병원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는 더러운 물을 먹는 모습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먹을거리로는 싹이 난 감자 하나뿐이었지만 허기를 버텨낼 수 없어 그것을 먹게 된 슈필만은 죽을 고비를 겪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먹는 것에 대한 욕구는 생존의 끝에 도달했을 때 인간이 느끼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아닐까 싶었다. 슈필만은 도주하던 중 호감을 갖고 있었던 친구 동생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아기를 갖은 것을 알게 된다. 그의 남편을 보고는 제일 먼저 건네는 말이 "죄송하지만 먹을 것 좀~~~".
폐허가 된 어느 가정집에 들어가 먹을 것을 찾다가 통조림을 발견한 슈필만은 독일 장교에게 들킨 후 피아노를 연주해 보라는 말을 듣고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가면서도 통조림을 챙겨 와 피아노 위에 올려놓는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통조림을 손에서 놓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놀랍기도 했다.
<피아니스트>는 단지 홀로코스트 영화로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인간 본연의 모습도 함께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영화의 농도를 채운, 쇼팽의 녹턴과 발라드
"저는 ------- 피아니스트입니 -------이었습니다."
독일 장교 앞에서 연주한 곡은 쇼팽의 발라드 제1번이다. 쇼팽은 그의 나이 스물한 살부터 서른두 살 때까지, 1831년부터 1842년에 걸쳐 모두 4곡의 발라드를 작곡했다. 쇼팽은 자신의 고국인 폴란드의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애국적인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발라드 1번의 경우에는 '콘라드 윌렌로드'라는 시가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슈필만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 당시 연주했던 곡은 쇼팽의 녹턴 C# 단조였다고 한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음악이 대사를 대신한다고 느껴졌다. 쇼팽의 발라드와 녹턴은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했던 많은 부분들을 관객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게 해 줬다.
폴란스키 감독은 이 영화로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감독상과 전미 비평가 협회상, 세자르 영화제 등을 휩쓸기도 했다. 그 자신 역시 유대계로 아우슈비츠에서 어머니를 잃었으며, 유대인 학살 현장을 직접 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이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슈필만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던 독일 장교 빌름 호젠펠트는 소련 수용소에서 88세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가 슈필만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면서 통조림 따개를 함께 전해주던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숨어 지내던 집의 벽을 타고 옆집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행복해하는 주인공의 미소도 생각나고, 눈앞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지 못한 채 건반 위 허공에서 소리 나지 않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전쟁의 공포와 비극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동시에 다양한 인간상에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는데, 슈필만을 도와줄 것처럼 다가왔던 바르샤바 방송국 기술자인 안텍은 슈필만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돈을 모아 가로채고 슈필만의 시계까지 챙겨 도망가 버린다. 나치에 협조하는 유대인 경찰은 가스실로 향하는 유대인 무리에서 슈필만을 몰래 도망치게 도와주기도 한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전쟁에 의해 드러나는 인간적인 본모습과 그 사이에서 음악이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인 것 같다.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을 연기한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도 돋보였던 영화였다. 물론 쇼팽의 녹턴과 발라드가 영화의 농도를 한층 깊이 있게 물들였던 것 같다.
쇼팽의 녹턴(Nocturne), 피아노의 시인이 부르는 아련한 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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