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던 전 세계가 인정한 영원의 러브스토리'라는 수식어가 동반되는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는 1997년에 개봉된 작품이다. 감독은 <리플리>와 <콜드 마운틴> 등의 작품으로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앤서니 밍겔라이다.
잉글리쉬 페이션트
- 감독: 앤서니 밍겔라
- 각본: 앤서니 밍겔라
- 개봉: 1997년
- 원작: 마이클 온다체의 소설 <잉글리쉬 페이션트>
- 음악감독: 가브리엘 야레
- 영국과 미국의 합작 영화
- 서사 로맨스 전쟁 드라마 영화
- 청소년 관람불가
- 출연: 레이프 파인스(라슬로 알마시),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캐서린 클리프턴), 윌럼 더포(데이비드 카라바조), 쥘리에트 비노슈(한나), 콜린 퍼스(제프리 클리프턴)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캐나다 작가 마이클 온다체가 쓴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그는 이 소설로 영국의 맨부커상을 받았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은 이 소설에 마음을 빼앗겨 영화를 위한 이야기의 재구성에 3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러한 각색을 통해 원작 소설과는 몇몇 부분에서 서로 다른 점을 찾을 수 있으니, 한번 책으로 만나보아도 좋을 것 같다.
수상내역도 화려하다. 1997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여우조연상, 감독상, 촬영상, 편집상, 미술상, 의상상, 음악상, 음향믹싱상을 비롯하여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과 여우조연상, 각색상, 편집상, 촬영상, 안소니 아스퀴스상을 수상했다.
또한 그해 시카고 비평가 협회상(촬영상), 미국 감독 조합상(영화부문 감독상), 베를린국제영화제(은곰상:여자연기자상), 골든 글로브 시상식(작품상: 드라마, 음악상), LA 비평가 협회상(촬영상),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감독상, 각본상), 유럽영화상(유러피안 여우주연상, 유러피안 촬영상)과 그 이듬해 런던 비평가 협회상(영국감독상)을 받았다.
아카데미상 9개 부문을 수상한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1987년 영화 <마지막 황제> 이후로 가장 많은 부문의 상을 거머쥔 작품이 되었다. 이렇게 많은 상을 받은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아픈 기억 속의 사랑이야기'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들여다보면,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들이 사랑에 빠진 위험한 사랑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이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던 것은 다름 아닌 레이프 파인스(라슬로 알마시 역)의 표정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냉혹한 나치 장교인 아몬 괴트 역으로 나왔던 그를 기억하던 나는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고 오열하던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슬프다는 어휘로는 그 표현이 부족하다고 느껴진 레이프 파인스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것을 느꼈지만 다가갈 수 없었던 절제된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고, 결국 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수줍은 미소까지, 그리고 연인의 싸늘한 주검 앞에서 그녀와 사랑에 빠진 자신을 원망하는 듯한 조용한 눈물까지도 감정을 쏟아내지 않아서 더욱 간절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지독하게 차가우면서도 열정적이었으며, 어느 순간에는 억제된 감정을 짓누르지 못한 채 위험한 도발을 보여주던 레이프 파인스의 눈빛에는 형언하지 못할 여러 가지의 어두움이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이 영화를 떠올렸을 때 가정 먼저 들게 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이 영화를 가끔씩 다시 보게 되었다. 아름다운 비행 장면과 모래폭풍은 변함없이 예술적으로 다가왔고,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복잡하면서도 섬세했고 위험했다. 몇 번을 다시 보면서 그제야 그들이 나눈 대화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언제 가장 행복했소?"
"지금요."
"그럼 가장 불행했을 때는?"
"지금요."
"매일밤 당신을 잊으려 해도, 아침이면 또다시 사랑이 벅차오른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또한 그들은 알고 있다. "새로운 사랑은 긴장되고 달콤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부숴버릴 거라는 것"도.
잉글리쉬 페이션트, 줄거리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무렵 광활한 사하라 사막을 지나는 비행기 한 대가 포격을 받아 추락한다. 극심한 화상을 입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알마시는 '잉글리쉬 페이션트'로 불리며 야전병원으로 실려간다. 야전병원은 계속 이동을 하게 되고,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되어 이동할 수 없는 알마시를 간호사 한나가 남아 간호해 주기로 한다.
폐허가 된 수도원에 남게 된 두 사람. 알마시는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한 권의 책을 한나에게 읽어달라고 한다. 그러는 사이 자신이 헝가리 귀족인 라슬로 알마시 백작인 것을 알게 되고, 1930년대 말부터 1945년 사이 토스카나와 카이로 그리고 사하라 사막에서 보낸 자신의 과거를 차츰 기억해 낸다.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였던 알마시는 지도를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프리 부부를 만나게 되고, 알마시와 제프리의 아내인 캐서린 클리프턴은 서로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그러나 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두 사람. 하지만 결국에는 사랑하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게 된다.
소유하고 소유당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던 두 사람은 위험한 사랑을 나누게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 제프리는 아내를 경비행기에 태운 후 아내에게 "정말 사랑해."라는 말을 남기면서 알마시를 공격하기 위해 급강하 저공비행을 하며 세 사람의 죽음을 시도한다. 그러나 제프리만 즉사하고 캐서린과 알마시는 살아남는다. 그리고 캐서린은 심각한 부상을 당한다.
이를 발견한 알마시는 캐서린을 동굴 속에 데려다 놓고 구조요청을 위해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사막을 달려 연합군을 만나지만, 그들은 알마시를 독일 스파이로 생각하고 체포한다. 기차로 이송 중 알마시는 동굴에 혼자 남아 있는 그녀를 위해 도망을 친다. 그리고 캐서린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다.
오직 자신의 캐서린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자신에게 있던 가장 소중한 것을 독일인에게 넘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만들었던 사막횡단 지도. 그리고 그 대가로 경비행기를 얻어 곧바로 동굴로 향했지만, 이미 캐서린은 숨을 거둔 후였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알마시는 캐서린을 비행기에 태우고 하늘을 날아 그녀를 따라가고자 한다.
그러나 결국 연인을 따라가지 못하고 치명적인 화상을 입은 알마시. 그는 자신을 간호해 주던 한나에게 이제 그만 캐서린 곁으로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한나는 그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고, 캐서린이 동굴에서 그를 기다리며 써 내려간 편지를 알마시의 마지막 가는 길에 읽어준다.
<캐서린이 동굴 속에서 죽기 전 알마시에게 쓴 마지막 편지>
내 사랑,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어둠 속에 있던 게 하루? 아니면 일주일?
이제 불도 꺼지고 너무나 추워요.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해가 있을 텐데.
그림과 편지를 쓰느라 전등을 너무 허비했나 봐요.
우린 죽어요. 우리가 맛보았던 것들, 연인들, 사람들과 함께요.
강물처럼 우리가 들어가 유영했던 육체들.
이 무서운 동굴처럼 우리가 숨겨왔던 두려움들.
내 몸에 이 모든 자취를 남기고 싶어요.
권력자들의 이름으로 지도에 그려진 경계선이 없는 우리가 진정한 국가예요.
전 당신이 돌아와서 저를 바람의 궁전으로 데리고 갈 거란 걸 알아요.
그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예요.
지도가 없는 땅, 그곳에서 당신과 친구들과 함께 걷는 것이죠.
전등이 꺼진 어둠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2차 세계대전이라는 배경 속에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아름다운 영상미로도 손꼽힌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는 경비행기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뛰어난 영상미를 보여주는 영화로 잘 알려진 <아웃 오브 아프리카>나 <아라비아의 로렌스> 못지않은 멋진 장면들을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한 화면 속 아름다움은 영화의 가치를 한층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음악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받은 9개의 상 중에는 음악상도 포함되어 있을 만큼, <잉글리쉬 페이션트>에 삽입된 음악들은 장중하면서도 애잔하다. 레바논 출신인 가브리엘 야레가 음악감독을 맡았는데, 그는 이 작품에 이어 <골드 마운틴>까지 앤서니 밍겔라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가브리엘 야레는 <카미유 클로델>과 <베티블루>, <테오와 빈센트> 등의 영화음악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한나(쥘리에트 비노슈)가 수도원에서 발견한 피아노로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비롯하여 집시풍의 헝가리 민속음악인 'Szerelem, Szerelem(사랑, 사랑)', 그리고 영화가 끝나갈 무렵 한나가 알마시에게 마지막으로 책을 읽어주는 장면에서 흐르던 메인 테마곡인 'Read Me to Sleep'은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잔잔하게 다가오지만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미 싸늘해진 사랑하는 캐서린을 안고 흐느끼는 알마시와 그의 부탁으로 다량의 모르핀을 투여하는 한나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보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어 버린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각기 다른 상황에서 복선을 암시하는 대목들이 서로 은유적으로 교차되기도 한다. 사막 한복판에서 알마시와 각국의 국제사막연맹과 지리학회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한 가지씩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말하게 되는데, 케서린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책 내용 중 하나를 소개한다.
리디아의 칸들리스 왕은 자신의 아내가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녔음을 증명하고자 신하에게 엉뚱한 제한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왕비는 신하에게 죽음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왕을 죽이고 자신과 결혼하여 새로운 왕이 되라고 한다. 결국 그 신하는 왕을 죽이고 왕비와 결혼하여 28년간 리디아를 다스렸다고 한다.
캐서린이 읽은 책 속의 이 이야기는 캐서린의 남편인 제프리가 사진 촬영을 위해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카이로로 혼자 떠난다고 할 때 알마시가 건넨 말과 묘하게 교차되는 기분이 들었다. 알마시가 "사막은 여자 혼자 살기에는 힘든 곳이다"라고 하자, 제프리는 "아내는 잘 결정해 나갈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무심히 떠나버린다. 그러한 남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는 캐서린의 시선이 알마시와 마주친다.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알마시와 캐서린의 관계와 교차되는 것은 간호사 한나와 폭탄 제거 일을 하는 킵의 사랑 이야기인데, 그들은 알마시와 캐서린의 경우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벽화에 관한 모티브도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알마시와 캐서린의 동굴 속 벽화와 한나와 킵의 성당의 벽화가 또 한 번 오버랩된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또 다른 감상 포인트
- 아름다운 여인의 곡선미가 느껴지는 사막의 모래곡선
- 사막이라는 공간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
- 자신들의 감정을 모른 척 외면했던 알마시와 캐서린이 더 이상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지 않게 된 계기가 된 모래폭풍
- 지도를 넘긴 알마시 때문에 엄지손가락이 잘린 카라바조가 다시 만난 알마시를 죽이지 않은 이유
- 영국인 환자로 불렸던 알마시가 국적도, 나이도, 이름도, 목숨조차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
- 3일 안에 캐서린이 있는 동굴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알마시의 상처
- 지도를 만드는 것은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 국가 간의 이권과 관계되는 체제 권력 안에서의 그것의 의미
- 알마시 협곡이라 부른, 캐서린의 쇄골절흔
- 제국주의가 갖는 영토에 대한 패권다툼이 사랑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 영화 도입부, 수영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붓끝
- 수영하는 사람들의 벽화가 가득한 동굴, 그 동굴이 지닌 의미
- 캐서린이 언제나 지니고 다닌 골무의 상징
- 알마시의 사랑, 캐서린의 사랑. 그 사랑의 색채와 간극
-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져다준 고통
- 캐서린이 알마시와의 만남을 끝내려고 했을 때의 진정한 의미는 사랑 자체를 끝내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명배우들의 리즈 시절을 만나보는 것도 흥미로운 감상 포인트가 될 듯싶다. 레이프 파인스는 물론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와 쥘리에트 비노슈, 킹스맨으로 유명한 콜린 퍼스와 작품마다 강렬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윌럼 더포까지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그냥 그러한 진부한 영화로 빠지지 않게 만든 것은 그들의 연기력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줘요." "약속해. 당신을 절대 혼자 두지 않겠어."
"심장은 불의 기관이다"
"우리는 소유관계가 아니잖아요."
"어느 날 밤 내가 당신을 보러 오지 않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기억을 잃은 게 아닐 거예요" "기억을 지우고 싶을 뿐"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영화를 보면서 좋다고 느낀 대사들도 많았는데, 지금 기억나는 것들은 이 정도인 것 같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떻게 보면 비극적이고, 지극히 통속적인, 그래서 별다를 것 없는 사랑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무엇인가가 있지 않았을까.
사회적인 기준에서 허락되지 않는 관계에 대해 굳이 그것을 포장하고 미화할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 느끼고 마음에 담으면 되지 않을까.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아픈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단 하나의 사랑에 대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그 기억과 상실, 그리고 치유의 과정들이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불어왔다가는 흔적 없이 사라지곤 한다. 애닮지만 너무 슬프지만은 않은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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