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아름다움/음악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동일하면서 다른 시간이 녹아든 수학적인 음악

난짬뽕 2023. 12. 2. 12:32
728x90
반응형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주인공 라슬로 알마시를 간호하며 마지막 죽음까지 함께했던 한나 역을 맡은 쥘리에트 비노슈가 폐허가 된 수도원에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듯 조금 빠른 템포의 피아노 연주곡이 경쾌하게 들려옵니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주연한 <비포 선라이즈>에서도, 한니발 렉터 박사 역으로 안소니 홉킨스가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주었던 <양들의 침묵>에서도 같은 곡명의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 하나의 동일한 음악이 달콤한 로맨스에도, 공포스러운 범죄와 스릴러 장르에서도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요. 

여러분들께서도 이미 눈치를 채셨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들 모두에서 완벽하게 어울렸던 음악은 바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입니다. 1741년에 작곡된 이 곡은 르네상스 이후 생겨난 많은 변주곡 중에서도 변주곡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변주곡(Variation)'은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주제를 설정하고 그 주제를 여러 가지로 변형한 연주로 이루어진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주곡을 시간이 녹아든 수학적인 음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변주곡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바흐의 음악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요. 종교적인 측면과 순수하게 즐거움을 추구했던 음악으로 접근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가운데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후자에 가깝다고 보는데요. 이 곡을 듣고 있으면, 18세부터 교회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던 바흐의 건반 테크닉이 집대성된 음악이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아름다운 주제를 이루는 아리아와 그 뒤를 이어 30편의 변주로 이어지다가 다시 주제로 마무리되는 형식인데요. 논리적인 측면을 추구했던 바흐는 숫자에 대한 관심도 많았는데, 특히 숫자 3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흐는 이 곡에서 3의 배수로 이어지는 변주에서 음정을 1도씩 증가시키며 수학적인 요소를 보여주는 동시에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분위기에 악센트를 심어 놓기도 했습니다. 

반응형

바흐가 이 곡을 작곡하게 된 것은 바흐의 오르간 연주를 듣고는 그의 팬이 되어버린 카를 폰 카이저링크 백작의 의뢰에서 비롯되었는데요. 바흐에 관해 최초의 전기를 쓴 독일의 음악학자 포르켈에 의하면, 카이저링크가 불면증이 심해 밤마다 침실 옆방에 음악가들을 불러놓고 자신이 잠들 때까지 연주를 시키곤 했는데요. 

그 음악가 중 골드베르크라는 이름의 어린 하프시코드 연주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흐에게 백작의 불면증을 다스릴 만한 음악을 부탁하여 하프시코드 독주곡을 받은 것이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남긴 포르켈 외에는 아무도 이 곡을 수면제 음악으로 말한 사람이 없다고 하여 믿을 만한 사실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곡은 처음에 '하프시코드를 위한 아리아와 여러 개의 변주'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지만, 연주자의 이름을 따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되었다고도 전해집니다. 저는 30개의 변주를 모두 듣고 있으면, 화려하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맑은 아름다움이 전해지며 투명하게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곤 한답니다. 바흐 이후에도 많은 변주곡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왔지만, 저는 이러한 이유로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좋아합니다. 

얼핏 보면, 우리들의 삶도 이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늘 하루하루가 똑같은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날은 맑음이었다가는 다시 흐려지고, 비바람이 불다가는 거짓말처럼 햇살이 쏟아지듯이 말이에요. 음악이 그랬듯이 우리들의 삶 역시 변주곡 그 자체가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매사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많은 음악가들이 연주했는데요. 저는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를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 글렌 굴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요. 연주 자체만 놓고 봤을 때에도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바흐가 전해주고자 했던 음악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합니다. 

글렌 굴드는 이 곡을 평생에 걸쳐 두 번 녹음했습니다. 스물셋의 나이였던 1955년에, 그리고 죽음을 1년 앞둔 1981년인데요. 첫 녹음은 38분 만에, 그리고 두 번째 녹음의 연주시간은 51분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말년에 녹음한 음반을 더 많이 듣는 편입니다. 음악이 정갈하다는 표현을 해도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글렌 굴드의 두 번째 녹음을 한번 들어보셔도 좋으실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분위기를 만나고 싶다면, 피아노가 아닌 하프시코드 연주를 추천드립니다. 원래 바흐가 이 곡을 작곡했을 때에는 하프시코드 곡으로 만든 것이었으니까요. 하프시코드가 전해주는 울림은 피아노와는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오실 거예요. 전체를 다 듣기가 지루하시다면, 영화 속에 삽입된 부분들만 들어보셔도 좋고요. 오랜만에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다가, 티친 분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에 듣기에도 참 좋은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여러분 모두 행복한 한 해의 마무리가 되시길 바랍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 아픈 기억 속에 영원히 잠든 단 하나의 사랑

 

잉글리쉬 페이션트, 아픈 기억 속에 영원히 잠든 단 하나의 사랑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던 전 세계가 인정한 영원의 러브스토리'라는 수식어가 동반되는 영화 는 1997년에 개봉된 작품이다. 감독은 와 등의 작품으로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앤서니 밍겔라이

breezehu.tistory.com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불완전함, 글렌 굴드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불완전함, 글렌 굴드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불완전함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한여름에도 장갑을 낀 채, 머플러를 두르고 코트까지 입고 다녔던 글렌 굴드(1932.9.25~1982.10.4). 완벽한 연주를 위해 무대를 떠나 리코딩만

breezehu.tistory.com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