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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 <푸른 들판을 걷다>,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위로

난짬뽕 2024. 10. 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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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 에지힐 단편 문학상 수상
  • 지은이: 클레어 키건
  • 옮긴이: 허진
  • 국내에 세 번째로 소개된 클레어 키건의 작품
  • 초판 1쇄 발행: 2024년 8월 20일
  • 펴낸곳: 다산북스

 

 

클레어 키건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이 구사하는 어휘들과 문체는 지극히 단순하다. 굳이 어떠한 꾸밈으로 수식하고자 하는 모습도 엿보기 힘들다. 그래서 그녀의 문장들은 대체적으로 건조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문장과 그다음 문장 사이, 혹은 문장들 뒤편으로 한 걸음 물러난 감정의 그림자들은 깊은 여운으로 호흡되고 있다. 클레어 키건의 글을 읽고 있으면 동시에 내 머릿속 한편으로 마음의 조각들과 그 잔재들로 형상화된 또 하나의 이미지가 함께 떠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클레어 키건의 작품들은 결코 눈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조심조심, 가슴의 언어로 다가갈 때 비로소 그녀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무언의 질문들에 대해 대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푸른 들판을 걷다>는 그녀의 대표작인 <맡겨진 소녀><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이어 우리나라에 세 번째로 소개된 클레어 키건의 작품으로, 소설집으로는 처음 선보이게 되었다. 1999년 데뷔작이자 첫 단편집인 <남극>으로 데뷔한 그녀의 두 번째 작품이 바로 이 책으로, 2007년에 출간되었다. 

클레어 키건은 수상 실적도 화려한데, 첫 단편집인 <남극>으로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과 윌리엄 트레버상을 수상했고, <푸른 들판을 걷다>는 영국제도에서 출간된 가장 뛰어난 단편집에 수여하는 에지힐상을 수상했으며, 2009년에 쓰인 <맡겨진 소녀>는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상금을 수여하던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했다. 

뉴욕 타임스 '21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2022년 오웰상(정치소설 부문)과 케리상(아일랜드 소설 부문)을 수상하고 그해 부커상과 래스본즈 폴리오상 최종후보에 올랐으며, 최근작 <너무 늦은 시간에>는 스토리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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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대답을 구할 기회

데뷔작 이후 8년 만에 선보인 이 책 <푸른 들판을 걷다>는 모두 일곱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목차

_ 작별선물
_ 푸른 들판을 걷다
_ 검은 말
_ 삼림 관리인의 딸
_ 물가 가까이
_ 굴복
_ 퀴큰 나무 숲의 밤

 

<푸른 들판을 걷다>는 내가 전에 읽었던 <맡겨진 소녀>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스하며 은유적이었던 두 작품과는 달리 이 책의 서사와 표현들은 매우 화가 나 있었으며 날카로웠다. 그 이면에는 주인공들이 겪었던 인간으로부터의 잔인한 비극과 상실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은 딸, 성직자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사제의 갈등, 감정의 무지함으로 괴로워하는 남자, 사랑이 빗나간 결혼생활에 지친 아내와 가족에게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모르는 남편, 약혼을 했지만 결혼이라는 무거운 책임에 다가가기 힘들어하며 불성실한 생활을 하고 타인을 통제하며 괴롭히면서 가학적인 쾌감을 즐기는 이기주의자 중사, 결혼을 약속했던 사촌이 사제가 되면서 버림받고 그의 아이를 낳지만 잃은 뒤에 은둔생활을 하는 여인까지......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에는 모두 상처받고 상처를 주는 인물들이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키건의 소설이 진부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인물들이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은둔생활을 하던 여인은 과거를 극복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사랑을 갈구했던 아내는 상처받은 딸을 대신하여 마을 사람들 앞에서 숨겨왔던 비밀을 폭로하며, 어머니의 묵인 하에 성적 학대를 받았던 딸은 몰래 아버지의 말을 팔아 새로운 출발을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결국 키건이 만들어 놓은 인물들은 현실에 머물러 있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이다. 

이 책에 수록된 소설 중에서 '물가 가까이'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20년 전 자신의 선집 <생일 이야기>의 개정판에 소개하며 찬사를 보낸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2004년에 외국 작가들의 단편을 엮어 출간하면서 하루키는 클레어 키건의 작품에 대해 "그가 꾸밈없는 단어와 문장들의 조합으로 만들어내는 단순한, 그러나 따듯하고 심오한 장면들은 머릿속에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는 극찬을 한 바 있다. 이 작품은 키건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단지 행간의 여백을 통해 독자들에게 여운을 남길뿐이다. 

한편 이 책에서 여섯 번째로 소개된 '굴복'은 아일랜드 소설가 맥가헌의 <회고록>에 실린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존 맥가헌은 클레어 키건에게 문학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로 알려져 있다. 맥가헌의 아버지는 몇 년 동안 약혼자였던 여성과의 결혼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골웨이의 벤치에 앉아 그 자리에서 오렌지 스물네 개를 먹었다고 하는데, 키건은 그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굴복'을 썼고, 이 소설에서도 그런 상황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마지막으로 '퀴큰 나무 숲의 밤'은 몇 편의 아일랜드 설화를 인용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로 인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는 아직 아일랜드에 직접 가보지는 못했다. 클레어 키건의 작품 속에서 보이는 아일랜드를 만날 때마다 왠지 회색빛 축축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키건의 작품은 개인적으로 처음 읽을 때에는 왠지 멍~~~ 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한 번 더 읽게 되면, 서서히 클레어 키건이 던지는 질문들과 맞닿게 된다.

이 책 <푸른 들판을 걷다> 소설집은 우리들에게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해 상기시켜 주는 듯하다. 만약 우리들이 미처 놓쳐 버린 그 시간들을 다시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책을 읽고 나서 그 대답에 대해 잠시 고민해 본다. 

 

<푸른 들판을 걷다> 책 속의 문장들

어떻게 보면 대화의 목적은 스스로 이미 아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모든 대화에 보이지 않는 그릇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야기란 그 그릇에 괜찮은 말을 넣고 다른 말을 꺼내 가는 기술이었다.  p 61

"파인트 세 잔만 마시면 안 해본 일이 없지." (~) "두 잔 마시면 못 할 일이 없고!"  p 72

침묵을 정숙함으로 착각했고,  p 85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p 166

강아지는 키운 방식 그대로 개가 된다.  p 167

성인이 된 다음에도 근거 없는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그렇게 빨리 증명된다면 좋았을 텐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대체로 어둠 속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p 190

누구나 무언가를 확신해야 했다. 그래야 하루를 이해할 수 있었다.  p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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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에 대하여

1968년 아일랜드 위클로에서 태어났다. 17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로욜라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이어서 웨일스대학교에서 문예창작 석사 학위를 받아 학부생을 가르쳤고, 더블린트리니티칼리지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디언은 키건의 작품을 두고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는 그가 25년간 활동하면서 단 5권의 책만을 냈는데, 그 모든 작품들이 얇고 예리하고 우수하기 때문이다. 

2022년 아일랜드 올해의 여성 문학상, 2023년 올해의 작가상, 2024년 지크프리트 렌츠상과 셰이머스 히니 문학상을 수상한 키건의 작품들은 국제적인 호평을 받으며 30개 이상 언어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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