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요?
백번 천번도 넘게 말했습니다.
전 아니라고요. 아무도 안 믿더라고요.
그때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세상은 진실을 듣는 게 아니구나.
세상은 듣고 싶은 대로만 듣는구나.
진실과 믿음에 대한 질문들, <죽이고 싶은 아이>
<죽이고 싶은 아이>는 내가 다섯 번째로 읽은 이꽃님 작가의 소설이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를 첫 만남으로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에 이어 <죽이고 싶은 아이>를 선택했을 때 그 제목이 주는 느낌이 사뭇 그동안의 이꽃님 작가의 작품들과는 결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빨리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의 인기가 많아서인지, 도서관에서 지난 8월 초에 대출예약을 했던 나는 엊그제에서야 책을 받아볼 수 있었다. 이 책과 함께 예약을 했던 <죽이고 싶은 아이 2>는 언제쯤 받아볼 수 있을까. 두 권을 모두 읽고 난 다음에 정리를 하고 싶었지만, 기약 없는 두 번째 책을 기다리며 <죽이고 싶은 아이>부터 다시 들여다보았다.
죽이고 싶은 아이
- 지은이: 이꽃님
- 초판 1쇄 펴낸날: 2021년 6월 7일
- 펴낸곳: (주)우리학교
<죽이고 싶은 아이> 줄거리
서은과 주연은 중학교 때부터 단짝 친구다. 어느 날 어떤 이유에선지 둘은 크게 다투었고, 다음 날 학교 건물 뒤 공터에서 서은이 죽은 채 발견된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주연이 체포된다. 부모로부터도, 친구들도 모두 주연을 믿어주지 못한 채, 주변 인물들의 증언들도 한결같이 주연을 범인으로 결정짓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주연은 그날의 일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팩트는 중요하지 않아, 사람들이 믿는 게 더 중요하지
이꽃님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죽이고 싶은 아이>는 진실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나는 종종 진실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진실은 사실 그대로인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는 것인지,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덧붙인다.
모두가 그렇다고 할 때, 아니라고 의심하는 일은 생각보다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롭게 모두의 의견에 동의하고 그렇다고 생각한다. 특히 범죄에 대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내가 심판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고 했을 때에는,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이 훨씬 더 절망스러울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아님에도 모두가 "네가 한 일"이라고 손가락을 세웠을 때 나는 얼마나 나를 믿을 수 있을까. 처음에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억울할 것이고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나를 믿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을 의심하기에 이를지도 모른다.
<죽이고 싶은 아이>, 책 속의 문장들
걱정하지 마. 엄마가 지켜 줄 거야. 걱정하지 마...... 어쩌면 주연이 너무 많은 걸 바랐는지도 모른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딸에게 네가 그랬느냐고 묻는 엄마 입에서 걱정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일 테니까. p 12
"무슨 소리야. 사람들이 믿으면 그게 사실이 되는 거야. 팩트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p 65
"도대체 난 너한테 뭐야? 절친이라며. 넌 절친이라는 게 필요할 때만 아는 척하는 사이라고 생각해? 너 요새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지? 내 기분이 어떤지, 무슨 고민이 있는지 관심도 없잖아." p 102
맞아. 나는 네가 좋았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뒤에서 내 욕을 하지 않을 친구라 좋았고, 내 속마음을 다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 내가 기쁠 때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줘서 좋았고, 내가 잘못해도 실망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지 않아서 좋았어. 너는, 그냥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라 좋았어. p 103
"우리 엄마는 뭘 잘 버리거든요. 아무리 비싸고 좋은 거라도 더는 자랑할 만하지 않으면 버렸어요. 저도 버릴 것 같았어요. 더는 자랑할 게 없으면...... 있잖아요. 엄마는 서은이도 싫어했어요. 친구를 사귀어도 어쩜 저런 애랑 사귀냐고. 공부도 못하고 가난하고, 내세울 거 하나 없는 애랑 놀아서 뭐가 남냐고.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화가 났어요. 서은이는 날 버릴까, 떠날까, 걱정 안 해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었거든요." p 121
아이가 죽음을 생각할 때까지 어른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다. 어쩌면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 그렇게 크는 거야, 누구에게나 약간의 고통은 있기 마련이야, 결국엔 잘 이겨 낼 거야,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린 그의 마음은 서서히 죽어갔다. p 126
진실이요? 백번 천번도 넘게 말했습니다. 전 아니라고요. 아무도 안 믿더라고요. 그때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세상은 진실을 듣는 게 아니구나. 세상은 듣고 싶은 대로만 듣는구나. p 142
솔직히 지난번 방송 보면서 너무 놀랐습니다. 가난은 선이고 부는 악입니까? 죽은 사람은 선이고 살아 있는 사람은 악입니까? 그렇다면 여기 있는 우리 모두 다 악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지 않습니까. p 165
우리는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있지는 않는가
<죽이고 싶은 아이>는 내가 읽었던 이꽃님 작가의 다른 책들과는 그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읽을 때마다 불쑥 웃음이 터져 나오거나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었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조금 더 진지하게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다.
한 여고생의 죽음이라는 소재도 결코 평범하지 않았는데, 그 사건을 둘러싼 진실과 믿음이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따라 거듭 변모되어 가는 과정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열일곱 명의 증언 인터뷰와 주연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과정에서 진실로 규정되었던 일들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게 된다.
내가 전에 읽었던 이꽃님 작가의 책들은 청소년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다정한 위로를 건네는 따스한 말 한마디였다면, 이 책은 어른들의 기준과 잣대로 상처받은 십대들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었을까 싶다.
진실이 마구잡이로 왜곡되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그럼에도 나는 진실을 진실하게 바라볼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바람을 가져본다. 이꽃님 작가의 이 책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돌이켜 보면, 청소년들의 문제는 그들 자신들의 문제가 아닌 부모와 어른들의 어긋난 시선과 본보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어떤 어른의 모습일까 되돌아본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방식들에 대하여
이꽃님 장편소설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그날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의 집착과 광기 사이, 이꽃님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
이꽃님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 내가 너의 행운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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