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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장편소설 <빛과 멜로디>, 사람이 사람에 의해 살 수 있다

난짬뽕 2025. 1. 18.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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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철로 된 무기와 무너진 건물을 지나, 올리브나무와 묘비 없는 무덤을 지나, 총성이 울리는 도시 한가운데 설치된 임시 병원에서 절망하고 흐느끼는 사람들과 그들의 상처를 봉합하고 소독하는 누군가의 손길을 지나, 살겠다는 의지를 포기한 적 없는 아기의 악센 손가락을 지나,
 한 아이가 들여다보던 스노볼 안의 점등된 세상을 지나,
 그 아이를 생각하며 잠 못 들고 뒤척이던 또다른 아이의 시름 깊은 머릿속을 지나,
 거울 속 세상과 그녀를 위해,
 영원에서 와서 영원으로 가는 그 무한한 여행의 한가운데서,
 멜로디와 함께......
 빛이,
 모여들었다. 

p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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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멜로디
  • 문학동네 장편소설
  • 지은이: 조해진
  • 1판 1쇄 2024년 8월 30일
  • 펴낸곳: (주)문학동네

 

장편소설 <빛과 멜로디>는 단편 <빛의 호위>를 조금씩 수정하며 더욱 확장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리아와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등을 배경으로 '사람이 사람에 의해 살 수 있다'는 뚜렷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조해진 작가는 <여름을 지나가다> <단순한 진심> <로기완을 만났다> 등의 작품으로도 이름이 나 있는 작가였는데, 나는 <빛과 멜로디>를 통해 조해진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어른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버려진 듯 홀로 생활하던 열두 살 권은이 카메라를 선물해 준 승준에 의해 죽음이 아닌 삶을 지속하게 되고, 그녀 또한 전쟁 속에서 다른 사람을 살게 하는 이야기이다. 

승준과 권은. 두 사람이 맺은 특별한 관계를 승준도 모르게 고요히, 그야말로 소리 없는 감정으로 신경써왔다는 사실을 떨쳐내듯이. 그건, 권은이라는 용감하고 아름다운 사진가에게 품은 깨끗한 마음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들은 친밀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심지어 승준은 오랫동안 권은을 잊고 살았는데, 어째서 그들이 세상 누구보다 애틋한 관계처럼 느껴지는지 민영은 알 수 없었다. 인터뷰 당시 스스럼없이 승준에게 알은체하지 못한 권은의 태도나 승준이 권은의 부상에 과도한 죄책감을 갖는 모습이 민영에게는 모두 이상하긴 했다. 그들은 뭐랄까. 사랑을 생략한 채 이별을 겪은 연인 같았다. 민영이 아는 한, 그런 관계는 그들뿐이었다.  p 155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

<빛과 멜로디>는 어린 시절 따스한 추억을 나눈 권은과 승준이 다큐멘터리 사진가와 기자가 되어 재회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권은은 내전 중인 시리아에 갔다가 왼쪽 다리를 잃는 부상을 입고 삶의 의욕을 잃게 되는데......

작가의 말에서도 밝혔듯이, 조해진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덜리치와 해머스미스, 차이나타운을 방문하기 위해 직접 런던을 찾아가기도 했고, 우크라이나를 찾아가 전쟁의 또 다른 얼굴을 카메라에 담아 온 사진가와의 만남,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룬 전쟁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했으며, 전쟁과 관련된 수많은 책과 영상들을 통해 자료조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너무 많은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어, 나에게는 너무 부풀어 오른 풍선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 곳곳에 여전히 크고 작은 분쟁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어서.
아픈 그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이 소설을 쓰는 것이 가능했다.
그랬으므로,
<빛과 멜로디>가 내 안의 미안함에 머무르지 않고
또다른 '사람, 사람들'을 만나 더 먼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흘러가 점등되기를 
지금 나는,
고요히 꿈꾼다.

망각되지 않고 기억될 수 있도록,
아픔과 고통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모일 수 있도록......

'작가의 말' 중에서

 

함께 생각해 보게 되는 문장

살마를 만난 뒤부터 그녀는 사람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다.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사진이 옳은지에 대해, 가령 배고픈 사람이나 다친 사람에게, 혹은 가족이나 연인, 이웃이 죽는 걸 목격한 적 있는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이 과연 맞는지에 대해...... 각자의 공간과 시간에서 그 사진을 접하게 될 익명의 사람들이 사진 속 고통을 미술작품처럼 관람하는 것에 그치거나 총알과 포탄이 부재한 자신의 현실에 오직 안도할 뿐이라면, 그런 사진이 과연 이 세상에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더 이상 판단할 수 없게 됐다.  p 55

 

<빛과 멜로디> 책 속의 문장들

"태엽이 멈추면 빛과 멜로디가 사라지고 눈도 그치겠죠."  p 10

그런 친구가 자신에게 있었다고, 카메라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며 빛을 좇던 친구가 있었다고 말이다.  p 17

"어쨌든, 나는 아픈 마음 하나 없이 지유를 키우고 싶어. 적어도 지유가 사리 분별을 하기 전까지는, 속물이든 멍청이든 누가 뭐라 비난하든, 나는 당분간은, 좋은 것만 보고 살 거야. 그러니까......" p  40

"중요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p 83

버려진 나를, 고작 숨을 멎게 해달라는 기도밖에 할 줄 몰랐던 열두 살의 나를, 그 자신도 모르게 다시 살게 한 사람이었으니까.  p 84

무지를 무죄로 활용한 사람들을 향해 천진한 기만이라고 했던 그 말을 들으며 게리는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p 110

어느 날 손에 들어온 카메라로 나는 다시 세상과 연결되었어요.  p 128

"내 걱정은 마.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더 쉽게 견딜 수 있는 법이니까. 대신, 꼭 살아서 돌아와."  p 142

"네가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걸 알았을 때, 사실 나는 비통했어. 어느 날은 료샤의 가슴을 치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아기를 가지면 안 됐다고. 이건 우리가 아기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잘못이라고 울면서 소리지르기도 했지.  p 142

평범하고 무탈한 하루하루를 삶에 주어진 불안을 차감해가며 안전하게 늙고 싶기도 했다  p 149

 

작가 조해진에 대하여

200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목요일에 만나요> <빛의 호위> <환한 숨>, 장편소설 <한없이 멋진 꿈에> <로기완을 만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 <여름을 지나가다> <단순한 진심>, 중편소설 <완벽한 생애> <겨울을 지나가다>, 짧은 소설집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젊은작가상, 무영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용익소설문학상, 백신애문학상, 형평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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