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진 게임의 법칙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생각들도 많은 혼란을 겪게 되었다. 형제애가 없는 무정한 형으로 매도되었던 놀부는 경제난을 겪고 있는 요즘 시대에 가장 현실적이며 이상적인 인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으며, 그에 비해 흥부는 자식까지 거느린 가장으로서 무능력한 전혀 책임감이 없는 형편없는 남편과 아버지로 비난받고 있다. 또한 매일 방 안에 앉아 '참을 인' 자를 써가며 울기만 했던 인현왕후보다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 보다 적극적이었던 장희빈이 현대의 활동적인 여성상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더욱이 아버지를 위해 바닷속으로 뛰어든 심청은 눈먼 아버지를 버린 채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했던 아주 나쁜 딸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강박관념은 바로 남들이 생각하는 그대로를 쫓아 나 자신 또한 같은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직된 사고, 융통성 없는 그러한 잘못된 고집이 지금의 나에게서도 느껴지고 있지는 않은가.
1
우리들은 각자의 생활 속에서, 혹은 어떠한 일로 다른 사람과의 인과관계를 맺으면서, 또한 무슨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들으면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하게 되고 그러한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고정관념에 얽매어 있는 것일까.
몇 년 전 어느 자리에서 나는 우연히 교과서에도 작품이 실린 아주 유명한 시인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중 어느 한 행을 언급하면서, 집필 시 본인은 이러한 의도로 쓴 그 구절을 독자들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다며 억울해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의미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읽히고 있다며,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그 시어에 대해 설명하며 뚜렷하게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자신의 뜻을 전해주기 바란다는 당부의 말까지 덧붙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 자리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참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시인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시각에서 독자가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 수많은 독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이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이다"라는 설명을 하고 다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그 시인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인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비록 자신의 산고가 있은 후에 태어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철저히 독자의 몫이라는 생각을 한다. 비록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독자의 사고까지 작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은 지나친 오만이 아닐까. 작가의 생각대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키려면 그 자신이 그들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해져야 하거나, 설령 그렇지 못하여 전혀 다른 뜻으로 독자가 이해한다면 그것은 작가 자신의 전이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작가가 다수의 독자들의 사고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또한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의 견해가 동일해져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강박관념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그러하다고 하여, 내 생각까지 그렇게 짜 맞출 필요는 없는 것이다.
2
백설공주와 왕비의 싸움은 아버지를 둘러싼 오이디푸스적 갈등이라는 말을 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산계급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던 옛날이야기를 그림형제가 기록한 작품 중의 하나인 <백설공주>의 초판을 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왕비가 계모가 아닌 친어머니로 쓰여 있다.
존 M. 엘리스는 원전 <백설공주>를 모녀 사이의 성적인 질투에 의한 적대 관계를 다룬 이야기라고 해석하고 있다. 왕비가 아름다운 딸을 원했던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기 위한 자기애적인 입장이 강했으며, 성숙해가는 딸의 아름다움을 같은 여자로서 인정하지 못한 얄팍한 질투심이 결국에는 딸을 죽이려 하는 음모에까지 이르게 하였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또한 유럽 각국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 내려온 <백설공주> 류의 이야기 중에는, 남편과 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근친상간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기에 왕비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을 결국에는 죽여야만 했고, 왕비의 명을 받은 신하가 차마 죽이지는 못한 채 숲 속에 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왕비가 사과와 머리핀을 가지고 백설공주를 찾아간 것은 그녀를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딸과 헤어져 있는 어머니로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평소 자신의 딸이 좋아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숲 속에 간 것이라 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백설공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귀여운 소녀였다기 보다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순수함은 찾아볼 수 없는 오히려 어른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불건전한 색기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한 점을 떠올리면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나쁜 왕비와 불쌍한 백설공주라는 그 생각이 조금은 흔들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이야기가 기록된 1808년의 메모를 보면, 공주가 들어 있는 유리관을 발견한 사람은 왕자가 아닌 왕자의 아버지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이 나중에 왕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왕자는 한눈에 반한 시체를 자신이 소유하기 위해 난쟁이들에게 후한 사례까지 한 후, 관을 성으로 옮겼다고 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관 옆에만 붙어 있었으며, 외출할 때에도 시종들이 그것을 짊어지고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했다. 혹시라도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관에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방에 자물쇠를 걸고 외출했으며, 식사 역시 그 관 옆에서 하는 병적인 시체 애호가였다고 한다. 살아있는 여자는 사랑하지 못한 채, 죽은 사람 앞에서만 당당해지는 성적 불능자였다는 기록이다.
이러한 점들을 복합적으로 엮어 생각해 보면, <백설공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삶의 한 단면을 형상화하여 지금에 이르러 더더욱 심각해진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성에 관한 의식들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설공주>는 비록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동화로 그 모습이 바뀌었지만, 그 출발은 어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감추어진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3
형 야코프 루트비히 카를(1785~1863)과 동생 빌헬름 카를(1786~1859) 형제의 <<그림동화>>는 1812년 발간된 초판에 이어 1819년 재판이 출판되고, 계속해서 3판(1837년), 4판(1840년), 5판(1843년), 6판(1850년), 7판(1857년)이 거듭되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그림동화는 이 가운데 대부분 7판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인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인어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행복의 왕자>, <개구리 왕자님>, <숲 속의 잠자는 공주> 등 그림형제의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많은 어린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림동화>는 그들이 원래 만들어낸 이야기에 비해 임신이나 근친상간 등 성적인 표현들이 철저하게 삭제되어 있다고 한다. 1812년 초판 원고와 학자들의 분석에 비추어 볼 때, 어쩌면 그림형제의 작품들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는지 모르겠다. 현대에 읽혀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으며, 정신분석학적 해석으로 보아도 많은 교훈을 던져주는 이 작품들이 단지 '꿈같은'이라는 수식어만이 붙는 어린이층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들에 지나지 않는 것은 - 동화는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태연한 표정으로 읽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동화다 -라고 한정시킨 동화에 대한 강박관념이 초래한 결과라 생각한다. - 어른도 읽을 수 있는 것이 동화이며, 어른이 또 다른 어른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라는, 아니 그림형제의 작품을 그 자체만으로 그대로 인정했었더라도 지금에 이르러 그들의 작품은 또 다른 시각에서 해석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림동화>는 세인들의 지나친 배려가 추락시켜 놓은 어른들을 위한 작품인 것이다.
다름을 인정했던 멋진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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