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아름다움/음악

침묵할 수 있는 자유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난짬뽕 2020. 12. 26. 10:51
728x90
반응형

침묵할 수 있는 자유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뒤집은 단 한 사람. 점보 747을 타고 하늘을 나는 피아노를 연주했던 그는 오히려 '지휘자들 마저 자신의 악기인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 다니지 않느냐'는 반문을 던지기도 했다. 85년간의 뜨거운 열정 속에 스스로 22년간의 침묵을 고집했던 그를 일컬어 사람들은 까다로운 고집쟁이라 말하지만, 나는 왠지 그의 그러한 모습에 기가 꺾이고 말았다. 자의에 의해 선택된 4번의 무대 연주 은퇴. 그것은 자신 스스로에게 너무나 당당한 사람에게서만 산출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로서의 자신감,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글 엄익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러시아 음악계. 그러나 한동안 모스크바 연주홀은 뛰어난 연주가들의 뒤이은 망명에 의해 조금씩 야위어 가는 것만 같았다. 첼로의 로스트로포비치를 비롯하여 바이올린의 하이페츠까지 그들은 소련을 등진 채 서방세계로 넘어갔으며, 물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소련인들은 그러한 떠나간 예술가들에 대한 아쉬움을 내색하지 않고자 지휘자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바이올리니스트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첼리스트 다니엘 샤프란 등에게서 그 위안을 받고자 했다. 그리고 비록 조국을 등지고 떠나간 연주가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방세계에서 속속 성공을 거둘 때마다 진정으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1986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마련된, 미국 시민권을 얻은 후 61년 만의 귀향 연주. 사람들은 열렬한 환영으로 그의 연주를 받아 주었다. 소련 사람들에게 있어 호로비츠는 여전히 위대한 피아니스트였다. 어쩌면 호로비츠 역시 단 하루도 조국을 잊은 적이 없는, 언제나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그리워했었을지도 모르겠다.   

 

점보 747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피아노

가장 절정의 시기에 한 번씩 쏟아놓는 침묵의 여정을 통해 그는 자신의 성공에 제동을 걸곤 했다. 때로는 신경성 질환이라는 소문이 나돌 만큼 그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 연주회 때에는 반드시 자신이 쓰던 스타인웨이 피아노만 친다는 조건 때문에, 그의 피아노는 항상 점보 747기를 타게 되는 호 대접을 받았다. 음악회 시간 역시 유독 오후 4시에, 그리고 일요일만을 고집했다. 고기를 먹지 않는 그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전속 요리사가 항상 동반되었으며, 물론 정수기를 챙겨가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호로비츠를 많은 사람들은 일상적인 까다로움이나 신경과민이라는 수식어로 매도했지만, 나는 악동 같은 그러한 호로비츠에게 오히려 다른 어떠한 연주가들 보다도 왠지 모를 더 큰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보통사람들과 그 생활 모습이 다르다 하여 일반적인 잣대로 기준된 한 가지 눈으로만 바라본다는 것은 너무나 경직된 사고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여 지나친 과장이나 허세에 관용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남들이 다 특이하다는 호로비츠의 음악을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왠지 그러한 까다로움이 더욱 그를 인상 깊게 떠올리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사진 SONY CLASSICAL / 점보 747기에 자신의 피아노를 갖고 다녔던 호르비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연주 모습은 지금의 우리들이 정석이라 여기는 자세와는 다른 소히 나쁜 자세에 해당했다. 루빈슈타인 식의 과장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의 손가락은 완전히 눕혀진 채로 건반 위를 더듬었으며, 손목과 앞 팔이 건반 아래로 매번 쳐져 있었다. 또한 의자에 앉는 자세 역시 보통 연주자들에 비해 피아노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페달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오직 핑거링만으로 토해내는 엄청난 포르티시모. 그래서인지 그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아무리 어려운 곡이라 할지라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마치 음악을 듣고 있다는 자체도 간과될 만큼 무의식적으로 들이마쉬는 공기처럼, 때로는 살짝 살갗을 스쳐 지나가는 잔잔한 미풍인 양 우리들의 의식 속에 동화되어 호흡되고 있는 것 같다. 

 

4회에 걸친 22년간의 침묵

완벽한 테크닉과 무한한 연주 색깔을 그려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수집한 음반들은 거의가 성악곡들로, 그는 자신의 연주의 뿌리를 목소리를 통한 노래에서 찾고자 했다. 피아노 연주가가 악구를 신호등처럼 왔다갔다 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그는 선율의 흐름을 중시 여겼다. 또한 그는 연주하기 전에 결코 남의 음반을 듣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혹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떠한 영향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는 것이 그 이유로, 호로비츠는 자신 안에서 자신만의 곡 해석이 발산되기를 원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을 통한 모방에서 초래되는 실수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그는 연주가 역시 작곡가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의미로서의 창조자라 생각했다고 한다. 음악 작품을 통해 말하고, 흐느끼고, 노래하고, 한숨짓게 만드는 자의식에 의한 재창조. 호로비츠는 그것을 연주가로서의 소명이라 생각했다.

그는 또한 루빈슈타인이 이른바 '백만불짜리 트리오'를 결성하여 화제에 올랐던 것에 비해,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하는 일이 거의 드물었다. 단지 바리톤 피셔 디스카우의 반주를 한 것이나, 로스트로포비치와 아이작 스턴과 함께 남긴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3중주 정도가 전부일 뿐이었으며, 1976년 메네스 음악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은 이후로, 가르치는 일 역시 거의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머리와 가슴과 기술적 수단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음악은 고통을 받게 된다. 머리가 없으면 패배자가 되고, 기술이 없으면 아마추어로 전락하게 되며, 가슴이 없으면 연주자는 기계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연주를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Vladmir Horowitz

***

1904년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예프에서 기술자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처음 이름은 블라디미르 고로비츠였다고 한다. 누이와 동생 역시 각각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는데, 그의 첫 스승은 바로 어머니였다. 6세 때부터 피아노를 접하게 된 호로비츠는 15세에 자신의 고장인 컨소바토리에 입학, 펠릭스 블루멘펠트의 교수를 거친 후 2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하게 된다. 

사진 SONY CLASSICAL / 호로비츠는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명으로 기억된다

 

그의 나이 21세에 이미 70회의 연주회를 가졌고, 레닌그라드에서는 23회의 독주회를 가진 호로비츠는 좀 더 폭넓은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1925년 소련 당국으로부터 6개월 기간의 해외 유학 바자를 얻어 서유럽으로 건너간다. 이듬해 함부르크에서 한 여성 피아니스트의 대역으로 연주하게 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통해 이름을 각인시킨 그는 파리에서 그의 연주를 들은 미국인 콘서트 매니저인 아더 저드슨의 주선으로 1928년 미국 연주 여행을 하게 된다. 

 

그의 미국 데뷔는 토마스 비캄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과의 협연으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면서 뉴욕 카네기홀을 흥분에 빼져들게 했다. 그로부터 5년 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그를 뉴욕 필하모닉의 베토벤 시리즈에 기용, '황제' 협주곡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를 계기로 그의 딸인 완다를 만나 밀란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내가 갖고 있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앨범

 

그러나 1936년 그는 불과 32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1939년 무대에 복귀한 그는 또다시 1953년 무려 12년간의 침묵에 들어갔고, 1968년 비록 리코딩은 쉬지 않았지만 또다시 5년간의 휴식, 그리고 1983년에서 1985년에 이르는 마지막 충전기를 갖는다. 

 

그것은 침묵이 아니라, 어쩌면 더 좋은 연주를 풀어놓기 위한 재도약의 움츠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침묵을 거쳐 만나게 되는 1965년 카네기 홀에서 열렸던 '역사적 귀환'이라 기억되는 연주회와 1978년 백악관에서의 '미국 데뷔 50주년' 연주회, 그리고 고향을 떠난 지 61년 만의 귀향 공연이었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의 공연은, 탁월한 기교와 강렬한 음향으로 대변되었던 젊은 날의 테크닉 위에 깊은 내면성을 함께 융화시켰던 것으로 지금까지 평가되고 있다. 

 

1989년 심장발작이라는 사인으로 사망한 호로비츠의 앨범은 그의 깊은 굴곡의 인생만큼이나 그 감상에 있어서도 고민을 안겨준다. 침묵을 고집한 전후의 색깔은 물론 젊은 날의, 그리고 말년의 터치감 역시 조금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으로 선보인 어떠한 앨범을 선택하더라도 전혀 후회는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 자신한다. 

 

굳이 하나를 추천한다면, 1989년 10월 20일부터 타계하기 4일 전인 11월 1일까지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녹음한 소니의 '라스트 리코딩'을 소개하고자 한다. 전곡에 넘치는 긴장감과 박력, 장대한 음악적 구축력과 기교로 승화된 한 편의 시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시인의 이름은 바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임에 부언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북극으로 떠나고 싶었던 고독한 천재, 글렌 굴드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불완전함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한여름에도 장갑을 낀 채, 머플러를 두르고 코트까지 입고 다녔던 글렌 굴드(1932.9.25~1982.10.4). 완벽한 연주를 위해 무대를 떠나 리코딩만

breezehu.tistory.com

 

클라라 하스킬, 척추장애를 이겨낸 제2의 모차르트

척추장애를 이겨낸 제2의 모차르트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 부드러운 독백에 취한 듯한 피아노 선율로 시작, 이러한 주제가 현악기로 옮겨져 잔잔한 울림을 전이시키는 Piano Concerto No.20 in Dmino

breezehu.tistory.com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