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으로 온 런던에 머문 지도 어느덧 2주가 훌쩍 흘러버렸다. 이제 한국으로 귀국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출장 마지막 주, 뮤지컬 한 편 보고 가지 않으면 많이 서운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서둘러 예매를 했었고, 퇴근 후인 저녁 7시 30분 공연을 보러 가게 되었다.
만약 남편과 함께 온 여행이었다면, 아마도 <오페라의 유령>을 보았을 것이다. 다양한 작품들을 모두 좋아하지만, 특히 남편은 <The Phantom of the Opera>의 뮤지컬 넘버들을 즐겨 듣곤 한다. 오래전 남편과 함께 런던에서 처음 보게 된 뮤지컬 작품도 바로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오리지널 웨스트엔드 공연을 보는 설렘에 1층의 명당자리를 예매했었고, 공연이 시작되는 시간보다도 훨씬 이른 시간에 허 머제스티스 극장(Her Majesty's Theatre)에 도착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여러 장르의 뮤지컬 작품들을 좋아하는 남편이지만, 특히 <오페라의 유령> 만큼은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통화를 하면서 내가 <라이온 킹>을 보러 간다고 말하니 남편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응, 잘했어. 시간 되면 <오페라의 유령>도 또 보고 와." 아휴, 나는 <라이온 킹>을 보러 가면서 나도 모르게 <오페라의 유령>의 '밤의 음악(The Music of the Night)'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1997년 뉴욕 뉴암스테르담 극장에서 초연된 라이온 킹(Lion King)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도 오랫동안 변치 않는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어린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연령에 상관없이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가족 뮤지컬로서 자리매김해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작품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는데도, 여전히 즐겁고 흥겹게 눈과 귀가 매료되고 만다.
브로드웨이는 물론 웨스트엔드에서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라이온 킹>을 선택한 이유는, 공연이 펼쳐지는 2시간 30분 동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있고 싶어서였다. 사람들마다 계절을 느끼는 방법은 모두 제각기 다를 것이다. 창밖을 내다보기만 해도 계절의 오고 감을 실감할 수 있겠지만, 언제인가부터 나는 부모님의 기일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되었다.
꽃피는 봄날이면 더 많이 생각나는 아버님과 생신날에 온 가족들이 모이는 어머님의 제사를 지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봄이 가고 여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어제는 우리 엄마가 떠나가신 날이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간다는 것은 세상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는 겸손함도 배우게 되지만, 때로는 혼자 삭혀야 할 그리움의 깊이까지도 함께 깨닫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뮤지컬 <라이온 킹>의 무대는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다. 의상은 물론 소품 디자인까지 모든 것이 충분한 볼거리들이다. 브로드웨이 개막 당시 뉴욕의 평론가들은 "인형과 배우, 무대와 동물 캐릭터의 완벽한 결합으로 뮤지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무대 위에 등장하는 거대한 코끼리와 수 미터 높이의 기린, 날쌘 표범, 간사한 하이에나, 아주 작은 생쥐 등에 이르기까지 <라이온 킹>에는 총 230여 개의 동식물 가면과 인형이 등장한다고 한다. 배우들은 동식물 가면과 인형을 쓰고 연기하는데, 그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생동감이 넘친다.
이는 아마도 여성 연출가인 줄리 테이머(JULIE TAYMOR)의 창의성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연출은 물론 의상과 인형 제작 등에 참여한 그녀의 빼어난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토니 어워즈를 수상한 최초의 여성 연출가인 줄리 테이머가 창조해낸 경이롭고 아름다운 무대 예술의 신세계를 실감할 수 있다.
작곡에 참여한 엘튼 존의 힘차고 신선한 음악들도 좋다.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지만, 나는 특히 주술사 라피키(RAFIKI)의 솔로가 참 멋있었다. 오프닝 넘버 셔클 오브 라이프(Circle of life)를 들을 때, 몇 해전 잠실 롯데월드타워 맨 위에서 인터내셔널 투어를 기념하여 제작되었던 영상이 생각났다. 그때 배우 느세피 핏젱의 목소리가 그 높은 곳에서 울려 퍼졌었다.
아마도 제목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이 음악을 들으면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신 곡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극장 양쪽 복도를 따라 배우들의 행렬이 등장하는 것으로 공연이 시작되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본다면 1층 양쪽 복도를 끼고 있는 좌석들을 예매하는 것도 자녀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안겨줄 것 같다.
애니메이션을 토대로 만든 <라이온 킹>은 사자의 왕자 심바가 아버지 무파사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험난한 과정이 아프리카 대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작품이다. 토니 어워즈를 비롯하여 그래미 어워즈, 뉴욕 드라마 비평가상, 이브닝 스탠다드 어워즈,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즈 등에서 의상과 무대, 조명 등 모든 디자인 부문을 휩쓸기도 했다.
이날 공연 역시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았다. 무대 오른쪽에는 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온 듯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앉아 있었는데, 공연 중간중간마다 보여주는 리액션이 무척이나 활기찼다. 그래서 공연장의 분위기가 더욱 좋게 느껴졌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좌석을 안내해주는 분이 연세가 아주 많아 보이는 할아버지였던 것. 어깨와 허리가 구부셨고, 걸음도 느리셨지만 이 넓은 공간에서 혼자 그 역할을 능숙하게 해내셨다. 사람들은 그 할아버지께 도움을 청했는데, 어느 순간 어디에서도 정확하게 자리를 찾아주시는 정장 차림의 할아버지의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영국의 뮤지컬 극장들은 공연을 볼 때에도 다양한 음료 반입이 가능하다. 실제로 아래 사진에서처럼 무대 앞에서 먹거리를 팔기도 하고, 굿즈샵 옆에 바가 있기도 하다. 어느 공연에서는 아이스크림과 맥주를 파는데, 그 인기가 대단하다. 내 옆사람은 퇴근을 하고 바로 와서인지 인터미션에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먹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그것이 낯선 풍경이 아니다.
<라이온 킹>을 관람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묘미는 사람의 목소리와 악기가 함께하는 조화로움을 느껴보는 것이다. 무대 옆 박스석에 퍼커션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 가지 전통악기들이 장면들마다 등장해 재미와 긴장감을 배로 가미시킨다.
공연 중 흘러나오는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는 '다 괜찮다', '문제없다'는 의미의 아프리카 스와힐리어에서 제목을 딴 것인데, 삼촌에 의해 쫓겨나 절망에 빠진 심바에게 티몬과 품바가 들려준 노래이기도 하다. 경쾌하면서도 흥겨운 멜로디도 좋지만, 가사 역시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는 따뜻함을 건네준다.
하쿠나 마타타!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하쿠나 마타타!
지나가는 잠깐 유행할 말은 아니라네
이 말은 남은 인생
걱정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이건 우리의 걱정 타파 철학이라네
하쿠나 마타타!
오늘 어떠한 이유로 인해 마음이 힘들다면, '하쿠나 마타타'를 불러보면 어떨까. 마법 같은 이 주문이 어쩌면 가슴속에 내려앉은 걱정들을 훨훨 날아가게 불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꼬마 사자 심바가 역경을 딛고 나아가는 과정은 어쩌면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셔클 오브 라이프(Circle of Life)의 의미는 '생명의 순환'이다. 우리 자신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바라보며, 어디로 가는지를 그 노래에서 말해주는 듯하다.
그에 관한 대답은 어쩌면 아주 간단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일,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는 것. 아마도 그것이 아닐까. 뮤지컬 <라이온 킹>이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고 있는 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그런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빗소리가 듣고 싶어 창문을 열었다. 처마를 통통 튀기는 빗방울들이 라이온 킹의 타악기들처럼 퉁~퉁~퉁 리듬감 있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마치 나에게는 '토~~ 닥~~ 토~~ 닥'이라는 운율처럼 다가왔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생상스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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