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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먼 우주 가까운 미래

난짬뽕 2023. 10. 7.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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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지은이: 김초엽
  • 초판 1쇄 펴낸날: 2019년 6월 24일
  • 펴낸곳: 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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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행성 이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제는 국경을 넘은 해외이주에서 점프하여 아직 개척되지 않은 행성들로 찾아가 생활을 할 수 있는 날이 정말로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처럼 지구에 남겨진 사람들이 제법 있었네. 사정상 제때 떠나지 못한 사람들,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 사람들이지. 우주 연방은 우리를 외면했네.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로 개척 행성에서 '먼 우주'로 급격하게 밀려난 행성들은 수십 개가 넘는데, 그 수십 개의 행성에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을 보내기에는 정체성이 너무나 떨어진다는 거야. 우스운 일이지." (p 170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에서)

그런데 다가오는 미래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안나가 언급한 말에서처럼 가족이 살고 있는 행성으로 떠나는 우주선 운행이 갑자기 중단되어 영영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는 변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우주 정거장'이 생길 만큼, 우리는 몇 달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씩만 가족을 만날 수밖에 없다면.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p 181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에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책 속의 어휘들

슬렌포니아 행성계, 제3행성, 리커다트, 딥프리징 기술, 인체 냉동 수면, 베타 부동액, 나노봇, 워프 항법, 워프 버블, 안티프리저, 고차원 웜홀 통로, 데브리, 플라스마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 했지."

"바꿔 말하면, 언제가 되어도 떠날 기약이 없다는 말이죠."

"미련하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다리는 일뿐이네."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이곳은 이미 100년 전에 폐쇄되었어요.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요."

"그걸 알면 뭐가 달라지나?" (p 172 ~173)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줄거리

자원이 풍부하고 살기 좋은 슬렌포니아 제3행성으로 개척 이주를 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안나의 남편과 아들도 지구와는 다른 곳에서 살아보고자 이주 행렬에 동참한다. 인체 냉동 수면에 혁명을 가져다준 기술인 딥프리징을 연구하던 안나는 지구에 홀로 남아 연구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린다. 

그 사이 우주 공간을 왜곡해 빛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워프항법이 개발되고, 이후에 훨씬 능률적인 웜홀 통로의 존재가 밝혀지자 딥프리징에 대한 연방 정부와 대중들의 관심이 낮아지고 연구 지원금도 줄어들게 된다. 그로 인하여 프로젝트의 종료 시기가 늦춰지는 가운데, 안나는 연구를 마무리 지으면 지구를 떠나 슬렌포니아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여생을 보낼 생각에 열심히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해가 바뀌고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 최대 규모의 콘퍼런스에서 그동안의 연구 발표를 앞둔다. 그녀는 마침내 인류가 완벽한 냉동 수면 기술을 완성했다는 중대한 발표 순간을 앞둔 전날, 행정 비서로부터 가족들이 있는 슬렌포니아행 우주선이 그다음 날 마지막 출항을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콘퍼런스가 끝나고 곧장 우주 정거장으로 가고자 했지만 시간이 지체되어 결국 가족이 있는 곳으로 떠나는 마지막 우주선을 놓치고 만다. 

폐기 시한이 지난 우주 정거장. 안나는 폐쇄된 그곳에 남아 있다. 우주 한복판에 홀로 남아 딥프리징 기술로 생명을 어렵게 연장하며 가족들이 있던 곳으로 가고자 하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작은 개인 우주선을 타고 슬렌포니아를 향해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를 원하는 안나. 그녀의 구식 셔틀로는 빛의 속도로 가더라도 슬렌포니아 행성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가더라도 수만 년이 걸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거장을 떠난다. 

 

"그 퀴퀴한 냉동 수면 기계에서 100년이고 200년이고 더 기다리실 겁니까? 어차피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은 오지 않아요." (p 175)

"언젠가는 슬렌포니아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기다리는 것이지. 언젠가는 이곳에서 우주선이 출항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언젠가는 슬렌포니아 근처의 웜홀 통로가 열리지 않을까~~~. 자네에게는 흘러가는 시간이 붙잡지 못해 아쉬운 기회비용이겠지만, 나 같은 늙은이에게는 아니라네." (p 177)

 

"당신이 100년도 넘게 동결과 해동을 반복하는 동안 거기 있는 당신 가족들은 이미 생을 다 누리고 떠났어요." (p 177)

"물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겠지." "그래도 가보고 싶은 거야. 한때 내 고향이 될 수 있었을 행성을. 운이 좋다면, 남편 옆에 묻힐 수도 있겠지." (p 178)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p 187)

 

작가 김초엽에 대하여

1993년생. 포스텍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생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7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대한 나의 생각

어느 분야이든지 많이 알고 있으면 시야가 넓어지고, 그로 인해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이 그러했다. 이론을 많이 안다고 해서 꼭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폭넓은 지식을 기반으로 쌓아 올린 구성은 탄탄하고 이음새가 짜임새 있었다. 

지식 나열의 현학적인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은 채, 무엇보다도 빠르게 읽어 내려갈 수 있어 좋았다. 서체 크기도 다른 소설책에 비해 큼지막해서 마음에 들었다. 막힘 없이 술술 읽게 되었다. 

우주 정거장에서 우주선을 기다리는 안나의 이야기. 작가 김초엽은 '작가의 말'에서 초광속 항법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에 일어나는 일을 다루어보고 싶었다는 말을 전한다. 나는 한때 인체 냉동 수면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었다. 생명 연장을 위해 혹은 불치병 치료를 위해, 또는 우주 개발의 한 분야로서 냉동 수면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될 때마다 나는 궁금했었다.

몇십 년쯤 혹은 백 년도 넘게 얼어 있다 보면, 그들이 소원했던 문제점들이 모두 해결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결과 해동을 반복하는 동안 그들 곁에 있던 사랑하는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모두 생을 마무리하고 떠났을 텐데, 나 혼자만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하는 엉뚱한 질문을 나에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의 표제가 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비롯하여 함께 실린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도 재미있고 흥미롭게 느껴졌다. 별이 유난히 밝게 빛나는 가을밤에 후루룩 읽을 수 있는 멋진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미래에 대해 들려주고 있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가 김초엽은 어려운 이야기도 읽기 쉽게 풀어내는, 자신만의 철학을 작품 속에 부드럽게 녹여내는 잠재력 있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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