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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나혜석이 나혜석을 말하다

난짬뽕 2023. 10. 15.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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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 지은이: 나혜석
  • 엮은이: 장영은
  • 펴낸곳: (주)민음사
  • 1판 1쇄: 2018년 3월 5일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수원시 팔달구에는 나혜석거리가 있는데요.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나혜석'은 어떤 모습의 색채일지 궁금합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은 나혜석이 남긴 열일곱 편의 소설과 논술, 수필, 대담 등의 자료를 근대 여성문학, 연애와 결혼, 사랑과 이혼, 모성과 육아, 정치와 삶을 주제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모두 5부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요. 1부에는 나혜석의 가장 대표적 단편 소설인 '경희'와 나혜석의 문학관을 파악할 수 있는 단편 '어머니와 딸'을 담았고요. 2부에는 나혜석이 여성의 연애와 결혼에 대해 쓴 글을, 3부에는 나혜석이 이혼 이후에 발표한 조선의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이혼고백장'과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남성 이기주의를 고발하는 '신생활에 들면서'를 싣고 있습니다. 

그리고 4부에는 나혜석의 육아관을 엿볼 수 있는 글을, 마지막으로 5부에서는 나혜석의 정치의식을 담은 글과 근대 신여성의 직업관에 대한 글을 만날 수 있는데요. 각 부의 말미에는 나혜석과 함께 이광수, 김기진, 김억 등 네 명의 문인이 1930년대 당시 미혼 남녀들이 결혼을 늦게 하는 풍조를 비평하는 '만혼 타개 좌담회'를 부록으로 엮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나혜석(1896~1948)을 보는 시선은 여러 갈래인 것 같습니다.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소설가이자 화가였습니다.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 입학했습니다. 1914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했고, 1918년에는 도쿄 여자 유학생 친목회 잡지 <여자계>에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습니다. 

이후 논설과 문학을 넘나드는 문필 활동을 통해 전통적인 여성관에 도전하기도 했고, 1919년 3.1운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조직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한 후 1921년 만삭의 몸으로 국내 최초로 유화 개인전을 열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고, 1923년에는 모성 신화를 부정하는 논설 '모 된 감상기'를 발표했습니다. 

1927년 남편과 세계 여행을 떠나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했는데요. 그때 만난 최린과의 연애 사건이 문제가 되어 35세에 이혼했습니다. 이혼 이후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그림과 글을 놓지 않았던 나혜석은 1948년 서울 시립자제원에서 무연고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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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월 19일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열린 나혜석의 전시회는 이틀 동안 수천 명의 관람객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이 전시회는 여성 화가로서는 조선 최초였습니다. 1918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 후 귀국한 나혜석은 함흥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여성 인권에 관한 논설은 물론 조혼과 가부장제 사회를 비판하는 소설도 꾸준히 발표했던 나혜석은 결혼 또한 남달랐습니다. 1920년 4월 10일 <동아일보> 3면 광고란에는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 청첩장이 실렸는데요. 한국 최초의 공개적인 결혼 청첩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 과정 또한 큰 화제가 되었는데요.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결혼 조건으로 "1)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2)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3)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라는 세 가지 항목을 제시했고, 김우영은 나혜석의 그러한 요구 사항을 무조건 받아들였습니다. 신혼여행 역시 놀라운 장소로 가게 되었는데요. 그곳은 '궁촌 벽산에 있는 죽인 애인의 묘'로 나혜석의 연인이었던 최승구의 묘였고, 김우영은 그를 위해 무덤 앞에 비석도 세워줬습니다.

1927년 유럽으로 떠난 나혜석과 김우영은 3년 동안 체류하며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나혜석은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는 동안 화가로서 더욱 성장하는데요. 법학 공부를 위해 김우영은 독일에 체류 중이었고, 파리에서 혼자 그림 공부를 하던 나혜석은 남편 친구인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나혜석은 최린에게 처음부터 "나는 공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 하렵니다."라고 말했고, 최린 또한 "과연 당신의 할 말이오. 나는 그 말에 만족하오."라고 동의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김우영이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나혜석은 최린에게 돈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우영이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하게 됩니다. 나혜석은 이혼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김우영의 결심은 확고했고, 결국 1930년에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 생활은 끝이 납니다. 

이혼 후 나혜석은 화가로서 사회적 재기를 모색하게 됩니다.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와 제국미술전람회에 잇달아 입선하며 화가로서의 사회적 존재감을 되찾는 듯했지만, 나혜석이 1933년 경성 종로 수송동에 설립한 여자미술학사는 경영난으로 실패했고, 같은해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낙선했으며, 1935년에 연 소품전 역시 철저하게 외면당하게 됩니다. 

이혼 후 나혜석을 둘러싼 여러 가지 소문들과 오해들이 증폭되면서 세간의 수군거림을 향해 나혜석은 한 편의 글을 세상에 내놓는데요. 그것이 바로 1934년 <삼천리> 8월호와 9월호에 발표한 '이혼 고백장, 청구 씨에게'입니다. 이 글에서 나혜석은 김우영과의 이혼 과정 전모를 스스로 밝힙니다. 그리고 1934년 9월 19일 나혜석은 최린을 상대로 손해배상 위자료 청구 소송도 제기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혜석은 예술가로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그저 스캔들의 주인공으로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나혜석은 이혼 이후 세상을 향해 홀로 설 수 없었으며 결국 조금씩 잊혀지고 맙니다. 

나혜석은 불교에 귀의하고 싶어 수덕사로 향했는데요. 주위의 만류도 있었고, 자신 역시 본인이 승려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수덕사 근처에 있는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고 합니다. 1944년 10월에는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바꿔 청운양로원에 들어갔는데요. 양로원에서 나와 방랑하던 중 1948년 12월 10일 길 위에서 사망합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나혜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나혜석을 떠올리면 어느 부분이 제일 먼저 생각나시나요? 이 책은 나혜석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들려주는 나혜석 그대로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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