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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 없는 음악 여정,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

난짬뽕 2021. 1. 1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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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로 재직 중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 교수님을 한예종 연구실에서 처음 뵌 것은 지난 2013년 3월이었습니다. 이미 해외에서 워낙 명성이 높은 바이올리니스트이셨기에 찾아뵙는 저의 마음도 마냥 떨렸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따뜻한 말씀으로 떨리는 저의 마음을 한순간에 잡아주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글렌 굴드나 호로비츠의 피아노 연주를 즐겨 들으신다고 하셔서 저 역시 그들 음악가를 좋아한다고 야단스럽게 말씀드렸지 뭐예요. 교수님은 그런 저에게 환한 웃음으로 공감해주셨습니다. 교수님은 자신의 마음가짐을 먼저 다스리는 사람만이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성주 교수님은 제자들의 연주무대를 마련해주기 위한 취지에서 1997년 'Joy of Strings'를 창단하셨는데요. 조이 오브 스트링스는 현재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무대에서 사랑받는 현악 앙상블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달 28일 예술의전당에서 한국과 스페인 수교 70주년을 맞이하여 선보이는 신년음악회에서 조이 오브 스트링스와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 교수님의 연주를 함께 만나보실 수 있다고 합니다. 

 

 

마침표 없는 음악 여정, 한국 음악계를 이끌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인 이성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세대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일찍이 세계 주요 콩쿠르 입상을 독차지하며, 국제무대에서 한국 연주가로서의 음악성을 과시하며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오직 바이올린과 함께 꿈을 꾸었고, 앞으로의 소망 역시 음악 안에서 펼치고자 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의 음악 여정을 따라가 본다.

글 엄익순

 

 

한국의 음악교육, 세계가 주목하다

1975년 시벨리우스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던 이성주는 2010년 그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연주를 했던 무대에서, 이제는 학생들의 반대편에 앉아 심사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오직 바이올린과 함께한 그동안의 생활이 스쳐 지나가며 감회가 새로웠으며, 음악인으로서 한길을 걸어온 것에 대해 자부심이 느껴졌다. 아울러 콩쿠르에 참가한 학생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그들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이겨냈고 고된 연습을 해왔을지 잘 알기 때문에 순위에 상관없이 모든 참가자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요즘에는 대체로 콩쿠르 참가자들의 연주 수준이 평준화된 것 같아요. 과거에는 실력 있는 연주자가 몇 명씩 손에 꼽힐 정도였는데, 지금은 어떤 콩쿠르든지 간에 참가자 모두가 전부 잘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제는 악기를 다루는 실력은 엇비슷하기 때문에, 연주 스타일이나 음악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자신만의 색깔로 담아내느냐 하는 예술적 표현 등을 눈여겨보게 되는 것이죠. 전 세계의 음악교육 수준이 그만큼 올라가 있다는 게 보여요. 예전에는 동양인 학생도 한두 명에 불과했는데, 요즈음에는 참가자의 50% 이상이 아시아 지역의 학생들이에요. 클래식 음악계의 흐름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넘어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죠. 특히 한국은 세계무대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어요. 콩쿠르에 참가한 연주자들의 실력이 매우 뛰어나고, 작품에 대한 접근이 남다르기 때문에 이목을 집중시키죠. 그렇다 보니 한국의 음악교육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흐름으로 볼 때 어떤 면에서는 지금의 이 시점이 우리나라 음악계가 조금 더 높이, 깊이 있게 성장할 수 있는 시기를 맞이한 것 같아요."

사진 이준용

 

국내에서 교육받은 연주자들이 세계에서 인정받는 결과물들을 계속 산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제자들에게 정성을 쏟았던 고국에서의 지난 20여 년의 시간들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겨졌다. 1964년 '서울시향 소년소녀 협주곡의 밤'에서의 연주를 통해 국내 음악계의 주목을 받은 그녀는 1966년 이화 경향 콩쿠르에서 특상을 수상하였다. 이화여중 재학 중 도미하여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입학, 고교시절에는 뉴욕시 고등학교 학생 대표로 뉴욕시장으로부터 '다이아몬드 쥬빌리상'을 받았으며, 줄리어드 음악학교 졸업 시 프랏츠 크라이슬러 펠로우쉽을 획득하여 줄리어드 음대 연주학 박사과정을 장학생으로 공부하였다.

 

1975년 시벨리우스 국제 콩쿠르, 워싱턴 국제 콩쿠르, 뉴욕 비니아프스키 콩쿠르에서 1위의 영광을 안았다. 곧이어 1976년 뉴욕의 영 콘서트 아티스트 오디션과 1978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1980년 퀸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1981년 나움버그 국제 콩쿠르 등에 입상함으로써 한국인의 뛰어난 음악성을 세계 음악인들에게 각인시켰다.

 

한국의 1세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해외 언론과 청중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녀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1994년. 한국의 음악 영재 발굴과 클래식 문화 발전에 뜻을 모으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간곡한 부탁을 선뜻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이성주는 한국 음악계의 중심에서 우리나라 학생들을 세계적인 연주가로 키워내고 있다.

 

조이 오브 스트링스, 제자들의 길을 열어주다

음악 전공자보다도 더 성악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와 연주자의 꿈을 간직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이성주는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만 5세에 처음 바이올린을 접하게 된 그녀가 본격적인 연주활동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1976년 '영 콘서트 아티스트 오디션'에 선발된 후, 그 이듬해 뉴욕 카프만홀에서의 첫 리사이틀이 '최고의 무대'였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부터이다. 영 콘서트 아티스트 오디션은 젊은 연주자를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열리는 국제 오디션으로, 입상자에게는 미국의 큰 공연장에서 정식 데뷔할 수 있도록 후원하며 향후 3~4년 동안 마음껏 연주활동을 펼치도록 후원해준다.

"한국에는 영 콘서트 아티스트 오디션처럼 재능 있는 연주자들을 선별해 후원해주는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역할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한 사람의 예술가를 키우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지원이 필요해요. 물론 음악이나 미술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이 개인적인 후원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보다 체계적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국제무대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단체나 재단, 기업들의 관심이 하루빨리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이성주는 제자들의 연주무대를 마련해주기 위한 취지에서 1997년 현악 앙상블인 'Joy of Strings'를 창단하였다. 지금까지 거의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어 관객들과 함께 음악적인 소통을 하고 있는데, 올해에 열리는 정기 연주회만도 30회가 넘는다. 음악적으로는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실력을 갖춘 그룹이기 때문에, 이성주는 '조이 오브 스트링스'의 해외 진출을 기대한다.

 

교수로서, 현악 앙상블의 예술감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이성주는 매년 50회 이상 무대에 선다고 한다. 때로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열심히 연주회에 몰두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는 질문을 받을 때도 있다.

 

"악보에서 보는 음악과 연주로 느끼는 음악은 다를 수가 있어요. 이런 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파악하여 음악을 큰 그림으로 보는 시각을 학생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크죠. 제가 연주회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에요."

 

2009년 국내 최초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하루에 연주하였고, 2010년 슈만 소나타 전곡에 이어 2011년에는 독일의 중견 피아니스트인 올리버 케른과 함께 브람스 소나타 전곡을, 그리고 2012년에는 뉴욕 데뷔 35주년을 기념하여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을 연주할 만큼 이성주는 연주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교수로서 제자들을 향한 사랑과 책임이 있는 동시에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연주활동이 결코 자신과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미 최고의 연주자로 인정받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음악인들과 함께 연주를 하고, 더욱 큰 무대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며,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 그녀는 지금까지 연주를 계속할 수 있었던 생활이 정말로 가장 큰 축복이라며 행복해한다.

사진 이준용

 

이성주는 학생들에게 '음악가로서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고민하라고 늘 말한다. 연주만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인으로서 올바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1등만이 인생의 목표인양, 혹은 콩쿠르에서의 입상만을 위해 인성이나 기본적인 예의는 무시한 채 테크닉만 중히 여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매번 강조한다. 아울러 그녀는 학생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연주자가 되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자신만의 색채를 지닌 연주가로 성장하여, 남들이 먼저 그들의 실력을 인정하도록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자 한다. 물질적인 욕심에 빠진 사람의 연주는 결코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음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가짐을 먼저 다스리는 사람만이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있다고 그녀는 조언한다.

 

또한 젊은 시절 겪게 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갈등 역시 성장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므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고 충고한다. 솔직하게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복잡했던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음악가라고 할지라도 연주하는 날의 컨디션에 따라 무대에서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또한 아무리 짧은 연주라 할지라도 그것이 무대에 오르기까지는 많은 시간 동안 긴장감의 연속이었음을 잘 알기 때문에 그녀는 후배 음악인들이 누구나 한 번씩은 겪게 되는 이러한 고민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해준다.

 

우리나라의 1세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세계무대에서 한국 연주가의 음악성을 과시하며 인정받았던 이성주. 그녀는 솔리스트로서의 꿈과 함께 지금 클래식 음악계를 이끌어갈 세계적인 인재를 키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끝없이 내일을 향해 도전하는 그녀의 음악 여정에서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밝은 미래가 엿보인다.

Vol. 68 APRIL 2013 Music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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