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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성 <빛이 이끄는 곳으로>, 다른 시간 속 기억과 추억이 한 공간에

난짬뽕 2024. 11. 1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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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에게 수많은 사연이 있듯이 집도 저마다 사연이 있는 법이다. 그 사연을 듣고 보고 느끼고 싶다면 천천히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사이에 집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주고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오래된 집은 그만큼 오랜 시간 누군가를 기다려 왔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느껴줄 사람을...... 때론 몇십 년, 때론 수백 년을 그렇게 기다린 것이다.  p 90

 

빛이 이끄는 곳으로
  • 지은이: 백희성
  • 초판 1쇄 발행: 2024년 8월 21일
  • 펴낸곳: 책읽어주는남자

 

<빛이 이끄는 곳으로>


암호로 풀어가는 미로 같은 비밀들

백희성 장편소설 <빛이 이끄는 곳으로>는 읽는 내내 흥미로웠고 재밌었다. 한 페이지를 읽고 나면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책의 제목이 왜 '빛이 이끄는 곳으로'였는지는 이 책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반사되는 빛이 가리키는 어느 한 지점을 쫓아다녔고, 그 빛을 따라 건물 안으로 유입되는 바람을 느끼기도 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빠져드는 수수께끼 같은 미로는 어느 순간 하나의 집으로 완성되었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어 있었고, 그들의 사랑과 추억이 잠들어 있었다. <빛이 이끄는 곳으로>는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듯했고, 암호로 설계된 건축물을 해부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나의 건축물에서 빛이 해낼 수 있는 역할들에 대한 메시지를 모두 만나는 것 같은 벅찬 설렘도 느껴졌다.  

 

건축가가 써 내려간 공간의 미학

<빛이 이끄는 곳으로>의 지은이 백희성은 작가이자 건축디자이너이다. 장 누벨 건축사무소를 비롯해 프랑스에서 10여 년간 건축가로 활약하였으며, 현재 KEAB 건축 대표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건축을 모티브로 한 이 소설이 보다 생생하게 다가온다. 

파리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던 그는 길을 지나다가 문득 아름다운 집을 볼 때마다 그 집의 우편함에 "당신의 집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편지를 적어 넣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집에 초대를 받았고, 그 집에 숨어 있는 신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수많은 파리의 저택에 발길이 닿았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 바로 이 책 <빛이 이끄는 곳으로>가 되었다. 백희성 작가는 사랑과 추억이 묻어 있는 집들이 다시 숨을 쉬고 살아날 수 있도록 닫혀버린 비밀들을 건축가의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

각 챕터마다 작가가 직접 그려 넣은 그림들도 스토리를 이어가는 데 있어 도움이 되었다. 그는 8년 동안 조사해 온 집들에 대해 약간의 허구를 덧붙여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여러 집에 대한 비밀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재탄생되어, 그 공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큰 힘을 발휘하는지에 대해 신비스럽게 풀어놓는다. 

 

 

삶의 경계에 선 공간이 갖는 크고 작은 의미들

요즘과 다르게 과거 집들의 문은 오직 하나뿐인 형태로 존재했다. 마치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문 또한 그랬다. 문은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그 집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저택의 문 앞에 서면 그 집과 첫인사를 나누는 기분이 드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각각의 문들은 서로 다른 말투로 인사를 건넨다. 때론 무섭게, 때론 무표정하게, 때론 웃음 지으며...... 사람의 표정과 닮은 존재, 그게 바로 대문이다.  p 51

통로나 복도 같은 길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물길도 길이고 바람 골도 길이다. 세상만물이 지나는 길. 길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상이 무엇이든 흐르게 해주는 것이었다. 숲 속을 걸을 때도 가끔 멈추어 지나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가 바람이 다니는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바람 길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옮겨 주는 길도 존재하는 것이다.  p 84

계단은 오르고 내리는 역할뿐만 아니라 위층과 아래층이 만나는 접합점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공간이 뒤섞이는 곳이기도 하다.  p 131

그렇다면 이 집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그에 대한 답은 아무도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집은 그렇다. 잠시 자신의 생을 사는 동안 빌려 쓰는 공간이다.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그 공간에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사람의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은 차곡차곡 쌓여 그 집의 역사가 된다.  p 219

건축가가 조금 부족한 공간을 만들면 그곳에 사는 사람이 나머지를 추억과 사랑으로 채운다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건축이 완성됩니다.  p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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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간 속 기억과 추억을 한 공간에 지켜가다

이 온실을 잠들어 있는 보석으로 명하니, 4월 15일 그 보석이 깨어날 것이다. 선각자는 이 깨어난 보석의 붉은 눈을 통해 비밀을 엿볼 것이다. - 프랑스와 왈처  p 148
그가 왜 4월 15일에 집착했는지, 왜 병원에 4월 15일의 의미를 담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에게 4월 15일은 가족이라는 의미의 또 다른 단어였다.  p 320

 

책을 읽다 보면, 공간에 대한 평면도와 함께 여러 가지 흥미로운 현상들도 이어진다.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구멍으로 빛줄기가 들어오면 카메라 옵스큐라 현상이 일어나 거꾸로 된 탑이 벽에 투영된다거나, 말도 안 되는 구멍을 벽에 뚫어 구멍과 구멍 사이를 관통해서 본다거나, 공간의 경계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을 벌려놓고는 그 틈으로 자연의 바람이 흘러들게 묘사하는 장면도 있다. 그곳은 사람이 지나는 통로가 아닌 자연의 나팔판, 자연의 통로였다. 

이 책은 한 집에 얽힌 시대를 달리 한 세 명의 주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집을 구하던 한 건축가는 파리 시태섬에 싼 가격으로 나온 집을 보게 된다. 폐허 같은 그 집의 주인은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어 직접 찾아가게 되는데, 그 주인은 건축가에게 "왜 4월 15일인가? 그리고 왜 당신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비밀을 풀면 집을 넘기겠다고 한다.  

수수께끼 같은 그 비밀을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에서 요양병원과 시태섬의 집에 대해서도 조금씩 숨어 있는 진실들이 드러나게 된다. 건축가와 집주인, 그리고 그 노인의 아버지까지 이어진 건축과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가 <빛이 이끄는 곳으로>의 줄거리이다. 

다른 시간 속 기억과 추억을 한 공간에서 지켜낸 그들의 비밀 속에서 건축은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치료하는 약이었고, 그녀의 기억을 지켜주는 안식처였다. 또한 자연의 모습으로 아픔을 위로하는 건축가는 무척이나 훌륭했다. 

'세상에는 말로 전하기보다는 직접 보아야 하는 것이 더 많고, 직접 보는 것보다는 눈을 감고 느껴야 하는 것들이 더 많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집도 그러하고, 사람도 물론이며,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사랑과 추억이 담기고 그 흔적이 남아 따스한 온기로 전해지는 집에 대해 생각해 본다. 만약 그러한 따스함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집은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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