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된 그들만의 암호
압구정동
압구정동이라는 문화의 한 조각을 들춰보면 그 속에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한 단면이 동시에 그려져 있다. 이곳의 패션과 건축, 혹은 거리의 사람들이 혼재된 풍경을 보면 압구정동의 물질적 토대는 탈 산업과 소비의 축적으로 지탱되고 있는 듯하다.
한국 물질문화의 쇼윈도 역할을 해내고 있는 압구정동은 마치 365일 동안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손님을 맞이하는 잘 정돈된 전시장 같다. 예전부터 방송국 카메라가 가장 빈번하게 찾아오는 곳이며,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신종 구경거리 지역으로 고급 물품이 즐비해 있는 부의 상징으로 대변된다.
그러나 압구정동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카페와 멋진 겉모습을 갖추지 못한 손님에게는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일정한 수준 이상의 소비 능력을 갖춘 그들만의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압구정동에서는 다수의 '많은 우리'들이 배제되어 있다.
오늘날 압구정동의 얼굴은 이분화되어 있다. 고급 아파트 단지와 상류층을 위한 호화 의상실이 늘어선 로데오 거리, 성형외과와 체형미 학원, 로바다야키 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고전적인 압구정동과 20세 전후의 젊은 층이 쏟아져 나오는 갤러리아백화점 맞은 편의 또 다른 신압구정동으로 나눌 수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 최고의 부촌으로 꼽힌 현대아파트와 그 시기 명동에서 이주한 패션가와 고급스러운 카페는 압구정동을 떠올리게 하는 대명사이다. 우리나라 첨단 패션의 메카로 떠오른 로데오거리는 갤러리아 백화점 동관 앞 사거리에서 강남구청으로 내려가는 대로변 양쪽으로 쇼윈도를 내놓은 패션가를 일컫는데, 미국 비버리 힐즈의 세계적인 패션거리인 '로데오 드라이브'에서 본뜬 것이라고 한다.
패션가는 미용실과 카페 등의 소비공간을 동시에 몰고 다니는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다. 그 후 모델라인과 같은 모델을 육성하는 학원이 동참했고, 그들과 관계있는 광고제작사와 사진 스튜디오, 이벤트 기획사 등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또한 유행에 민감한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며, 거리에서 연예인으로 캐스팅되는 확률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압구정동을 엿보고자 한다면, 우선 현대백화점이나 갤러리아백화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다. 먼저 현대백화점 맞은편의 이면 골목을 천천히 걸어 도산로 방향으로 걷다 보면, 간판에 쓰인 생소한 어휘에도 만취될지 모르겠다. 그곳에서 다시 학동사거리 쪽으로 내려오면 요란한 소문의 발상지인 로데오거리와 마주치는데, 그곳을 빠져나와 압구정로와 만나는 대로로 나오면 두 개의 몸으로 쪼개어져 서 있는 갤러리아백화점이 보인다.
지금까지의 동선을 선으로 그려 보면, 아주 완벽한 긴 네모꼴이 완성된다. 사람들은 그 크지 않은 울타리 안을 동경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직접 그 안으로 동화되기 위해 침범하여 많은 풍요의 골목들과 낯선 기호들을 이리저리 둘러보기도 한다.
그러나 자정을 알리는 시계추 소리와 함께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처럼, 이 네모 공간을 빠져나오면 우리들은 다시 이방인이 되고 만다. 모든 사람들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인색한 곳. 특별한 그 무엇인가가 선행되어야만 이곳의 주인이 되는 보이지 않는 선. 그것이 바로 압구정동이 말하는 게임의 법칙이 아닐까. 오늘도 여전히 압구정동에는 바람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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