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아름다움/음악

지성과 감성 사이의 음악적 징검다리, 피아니스트 조은아

난짬뽕 2021. 1. 20.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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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조은아의 음악은 사람과 세상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음악은 음악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음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역할과 방식으로 늘 우리 곁으로 다가옵니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음악 강연에서, 신문 칼럼에서도 조은아 피아니스트는 음악으로 소통합니다. 음악을 통해 세상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를, 2012년 8월 그녀와의 인터뷰에서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성과 감성 사이의 음악적 징검다리

피아니스트 조은아

 

 

조은아의 피아노 선율은 한 편의 시다.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은유적 시어로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동요시킨다. 또한 때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체되어 있는 이성을 한순간에 깨우기도 한다. 피아니스트 조은아는 언제나 자신의 음악적 깊이와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하며 도전하고 있다. 

글 엄익순

 

 

자신의 음악을 객관화하다

2008년 <Etudes, 손의 노래>, 2009년 <Schubert-역려과객(逆旅過客)>, 2010년 <구조와 선율>, 그리고 2011년 <녹턴&비르투오소 : 대비와 충돌의 미학>에 이르기까지 귀국 후 피아니스트 조은아의 독주회는 언제나 색다른 주제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테크닉보다는 상상력과 노래, 시상을 들려주고자 노력했던 <Etudes, 손의 노래>에서는 경직된 인식의 틀을 허물고 은은하게 감정이 묻어나는 연주를 희망했다. 변주곡을 연결하는 침묵의 타이밍에서도 마치 악기와 사랑의 속삭임을 나누듯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슈베르트의 음악 속에서 쓸쓸하게 걸어가고 있는 김소월을 떠올리게 된 <Schubert-역려과객(逆旅過客)>은 동서양을 대표하는 두 젊은 나그네의 실연과 방랑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구조와 선율> 역시 음악의 바탕을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재료를 서로 엮어 입체적으로 형상화한 무대다. 푸가와 변주곡, 소나타 등의 절대음악 형식을 토대로 연주자의 학구적 탐색을 '구조'라는 영역으로 전개했으며, 아름다운 멜로디와 낭만적인 이야기를 '선율'을 통해 격정적인 감정으로 표출해냈다. 한편 <녹턴&비르투오소 : 대비와 충돌의 미학>은 서로 부딪히면서 확장되고 힘을 얻는 예술 세계에 대한 경의와 갈망을 표현하였으며, 2012년 독주와 실내악 연주를 통한 <볕과 그늘을 잇는 나무의 울림>에서는 독백과 대화로 관객들과 소통하고자 했다. 

사진 이준용

 

이처럼 피아니스트 조은아는 언제나 무대에서 연주를 통해 청중에게 말을 걸고, 음악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그녀의 연주회는 한 편의 시가 낭송되는 듯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것은 연주자로서의 음악적인 소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만을 위한 음악은 나르시시즘에 머물 수 있고, 감정의 연민에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연습실에서의 고독을 업으로 삼는 연주자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위험요소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음악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늘 연주회의 주제를 고민하고, 연주를 통해 청중들에게 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는 것은 바로 저를 위한 커리큘럼을 스스로 결정하고 진행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즐기는 데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음악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중의 기운이 느껴지고, 제 음악에 대해 공감해주는 관객이 있다는 것은 연주자에게 아주 큰 힘이 되니까요."

 

사람과 세상을 향한 연주

"피아노 음악은 가사가 없는 음형의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신의 환경이나 기분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죠. 특히 긴 세월 동안의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고전음악에는 감동의 여운에 색다른 깊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품을 사용설명서대로 연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처럼, 작곡가의 머리와 가슴이 되어 나의 이야기인양 읽어내는 노력이 필요하죠. 악보를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진 설계도라 여기고 선율의 고저와 화성적인 긴장과 갈등, 최고 정점의 높이와 강세 등을 분석해내는 연습을 하게 되면 어느 순간 평면적인 악보가 입체적으로 세워지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이 시대의 음악의 역할에 대해서 연주자들 스스로가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의 삶 속으로 어떻게 구체적으로 음악을 흡수하여 조화를 이룰 것인지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는 기회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독일 하노버 음대와 프랑스 파리 에꼴 노르말과 말메종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후 2006년 귀국한 조은아는 KAIST 대우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와 국립 순천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와 국민대, 선화예중고에도 출강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수많은 독주회와 초청 연주회를 가졌던 그녀에 대해 독일 현지의 <민덴신문>은 '테크닉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피아니스트는 많지만, 음악적 내용과 이야기를 들려주는 연주자는 드물다'며 '내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독창적인 연주를 들려준다'라고 조은아의 피아니즘을 호평했다. 한편 프랑스의 피아니스트이자 그녀의 스승인 크리스티안 이발디는 '고도의 집중력과 따스한 인간적 감정이 배어 나오는 연주자'라는 칭찬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연습실은 음악가별로 정리되어 있는 음반 800여 장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며, 음악뿐만 아니라 역사를 비롯한 인문학, 사회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도서들이 책장은 물론 피아노 주위에도 못다 푼 숙제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등산을 하며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고, 여행과 산책을 통해 사람들의 일상을 함께 호흡하며, 연습을 하다가 잡념이 생기면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느끼며 생각을 정리한다고 한다. 독일 유학시절, 학업과 연주활동으로 분주했던 그녀는 자신의 바쁜 일정을 할애하여 호스피스 교육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다양한 영역의 폭넓은 경험은 그녀의 음악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되었다.

 

 

하나의 음과 음이 서로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선율이 되듯, 조은아의 음악은 사람과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그래서 그녀의 음악은 음악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음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역할과 방식으로 늘 우리 곁에 있다. 이공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서양 음악사에 관한 카이스트에서의 강의도, KBS 클래식 FM에서 스튜디오 실연을 통한 체르니와 소나티네, 명곡집 등의 원 포인트 레슨도, 그리고 렉쳐 리사이틀을 통해 직접 학생들과 만나는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수업 역시 모두 유기적인 학문과 조화를 이룬 음악적 소통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음악을 통해 세상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음악이야말로 진정으로 살아있는 연주라고 생각합니다. 음악과 다른 분야의 융합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고 다음 독주회에서 저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 드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어요."

 

음악으로의 항해, 즐겨라!

그녀의 피아노 위에는 항상 스톱워치가 놓여 있다. 연주회를 위해 몇 시간을 연습하는지,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몇 번을 연습했는지 일일이 체크하여 기록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자신에 대한 구체적인 데이터와 통계를 갖추는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100시간 정도를 연습하면 작품이 손에 익숙하고, 150시간을 넘기면 머릿속으로 어렴풋이 암기가 가능하며, 200시간 이상을 연습하면 다른 사람 앞에서 연주가 가능하다는 식의 나름대로의 계획을 기준으로 연습에 집중하기 위한, 자신만의 안전장치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스톱워치 옆에 펼쳐진 노트에는 '바를 정(正)' 한자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연주해야 할 곡을 스스로가 만족할 만큼 완벽하게 소화해냈을 때에만 획을 긋는다고 하니, '正'자를 한 번 쓰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반복된 연습이 뒷받침되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진 이준용

 

이뿐만이 아니다. 조은아는 연주회 일정에 따른 별도의 연습 노트를 갖고 있다. 구체적인 연습방법을 나열해 놓는가 하면, 나태해진 자신을 채찍질하며 연습 시 불현듯 떠오른 생각의 파편들을 정리해 보기도 한다. 2008년 2월 23일의 연습 노트를 살짝 엿보니, "연습과정엔 스스로를 끊임없이 불신하며, 무대 위에선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연주에 몰입하기 위해서 물을 마시거나 전화 통화를 하는 시간까지 철저하게 관리하는 그녀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무엇일까.

 

"인생이 주는 우연과 환경의 변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음악적 완성도에 이르기까지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스스로의 규범을 '함께' 갖춰가자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절대로 전자제품의 매뉴얼처럼 정해진 방식대로 연주하지 않았으면 해요. 학생 스스로 음악을 이해하고, 판단하여 자신만의 음악으로 '독립'시키는, 음악적 독립의 노력을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머지않아 조은아는 독주회뿐만 아니라 음악 이야기를 담은 책과 음반을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다음 연주회에서는 피아노와 컴퓨터를 활용한 가상음악과의 만남을 기획하고 있다. 드럼과 신시사이저 등의 악기가 피아노와 어우러져 무대 위에 올려진다고 한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연주자의 입장에서 조은아는 걸어가고자 결심한다. 놀랍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다.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도와 도전이 클래식 음악 안에서 사뭇 어떠한 모습으로 펼쳐질지 기대가 크다.

 

현재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아이들 위주의 교육으로 편중되어 있는 피아노에 대한 인식을 평생교육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 주 5일제로 인해 여가생활이 중요시된 요즈음 어른들을 위한 피아노 교육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클래식 음악과 컴퓨터를 통한 음악과의 새로운 융합 역시 우리나라 피아노 교육에 대한 그녀의 오랜 고민에서 비롯되었으며, 또 하나의 음악적 교육시스템으로 선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한 피아니스트 조은아의 음악적 행보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Vol. 61 SEPTEMBER 2012 Music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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