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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구병모 장편소설 <파과>

난짬뽕 2024. 3. 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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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 2013년에 출간된 <파과>의 개정판
  • 장편소설
  • 지은이: 구병모
  • 초판 1쇄 발행: 2018년 4월 16일
  • 펴낸곳: (주)위즈덤하우스

 

구병모 장편소설 <파과>

 

지킬 것이 없이 살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

<파과>는 구병모의 장편소설이다.  2013년 출간된 이 작품은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주목할 만한 책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주에 책 반납을 하러 도서관에 갔다가, '파과'라는 제목에 이끌려 책장 앞에서 몇 장 읽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 정도가 흘러 있었다. 처음에는 평범하지 않은 제목에 시선이 갔던 거였는데, 책을 펼치니 이야기의 소재가 독특했다. 

 

이 책 <파과>는 45년간 방역업자로 살아온 65세의 여인인 조각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와 삶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방역업자란, 의뢰인의 부탁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독특한 소재가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파과>의 중심에 육십이 넘은 방역업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서 불리는 그녀의 이름은 조각이다. '조각'이라는 별칭에서 느껴지듯이, 방역업자로서의 그녀의 임무 수행은 한 치의 군더더기도 남기지 않을 만큼 완벽했다. 

 

방역업자의 길을 걷게 된 그녀, 조각은 40년 넘게 이어온 그 세계에서 어떠한 오명도 남기지 않은 프로였다. 그런데 그러한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 주변에 시선이 가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맡은 업무를 감행하지 못한다. 세상과 어울리지 않았던 냉혹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마음에 한 조각씩의 상처를 묻고 사는 사람들

이제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마주친 첫 순간 투우는 그녀의 버들눈썹과 옴쏙한 두 빰이며 강팍해 보이는 입술을 바로 알아보았고 물론 상대편에서는 소 닭 보듯 멀뚱히 건너다보며 이쪽에서 선배에게 건네는 인사를 거절했다. 우리는 서로 모르고 지내도 되네. 팀워크로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알고 지내서 이익 될 만한 사람도 아닐세.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함이 확실해지자 그의 몸 한 귀퉁이에서 약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 시절과, 그것을 이루거나 부순 몇몇 장면들이 요동하며 그의 눈꺼풀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p 130

 

같은 방역업체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투우는 그녀, 조각의 주위를 맴돈다. 그런 투우가 조각은 신경 쓰인다. 젊은 투우는 왜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조각은 그러한 투우의 행동들이 왜 자꾸만 거슬리게 느껴질까.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는 자신을 목격한 소년에게 "잊어버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언젠가는 그 살인자의 심장에 칼을 꽂고 말겠다고 결심한 소년은 20년 후, 젊은 킬러가 된다. 

 

어떻게, 한때 내 아비의 대갈통을 박살 냈던 여자가, 고작 그런 일을. 그것만은 있어선 안 되는 일.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뻗은 손을 슬그머니 거둬들여 입 맞추며 그는 다만 바라보았다. 끌어당겨 손가락에게 감아보고 싶었던 머리카락 대신, 거기엔 푸석하고 건조하며 구불거리는 잿빛 머리카락이 손 닿지 않는 선반 위의 해묵은 먼지처럼 뭉쳐 있었다. 그것은 기억과 호환되지 않는 현재였고 상상에 호응하지 않는 실재였으며, 영원히 괄호나 부재로 남겨두어야만 하는 감촉이었다.  p 131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는 의미

그녀는 45년간 수많은 업무를 처리해왔고 방역 대상의 대부분이 가족 있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남은 가족에 대해 그 어떤 느낌도 가져본 적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길지 않은 나날, 류와 조 두 사람 사이에 끼어 기이한 형태의 가족을 이뤄보기도 했고 어느 시절에는 류하고 둘이서만 지내기도 했지만 그중 어떤 것도 일반적인 가족에 해당하지 않았으며 류에게 의지하고 류가 세상의 전부였다 해도 그에게 느낀 감정은 집착과 애정의 착종에 다름 아니었다.  p 178

 

45년간 날카롭고 냉혹하게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살아온 65세 여성 킬러 조각은 이제 몸도 기억도 예전만 같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킬러 생활을 해왔지만, 자신도 모르게 지키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씩 마음에 자리 잡는다. 버려진 늙은 개를 데려다 키우고, 폐지가 가득 실린 리어카를 끄는 노인을 도와주기도 하며, 청부 살인을 부탁하러 온 의뢰인의 얼굴에서 딸을 잃은 슬픔과 공허를 공감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을 치료해 준 의사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되는데, 이러한 조각의 감정변화를 옆에서 지켜보던 젊은 킬러 투우는 의사의 딸을 납치하여 조각을 자극하게 된다. 조각은 의사 딸을 구출하고 그의 가족들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마지막 업무라고 생각하며 투우와 맞선다. 

 

어린 조각은 왜 킬러가 되었을까,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남의집살이를 하며 어렵게 살아가던 조각은 운명처럼 류를 만나 방역업을 시작하게 된다. 자신을 지켜준 류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지만, 그는 조각에게 지킬 것을 만들지 말라고 말한다. 부상을 입은 조각을 몰래 치료해 주고 킬러라는 그녀의 비밀을 숨겨준 의사는 류를 닮았다. 그래서 그를 보면 자꾸만 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사라졌던 인간적인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된 계기가 된다. 

 

작가 구병모 문체의 힘

구병모의 <파과>를 읽을 때 술술 막힘 없이 읽히는 것이 참 신기했다. 평범하지 않은 소재와 때로는 거친 표현들이 강렬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낯선 문체들이 거부감 없이 오히려 부드럽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그 이유는 바로 문장에 있었다. 장편소설 <파과>의 문체는 단문이 아닌, 장문이다. 결코 짧지 않은 만연체가 주를 이룬다. 컴머가 몇 개씩 포함된 긴 문장인데 늘어지는 느낌 없이 깔끔하다. 읽고 있으면 그것이 마치 단문을 소화하듯 호흡도 막히지 않는다. 긴 문장도 지루하지 않게, 걸림 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은 단연코 작가 구병모 문체의 힘으로 다가왔다. 

 

60대 여성 킬러의 이야기를 담은 <파과>.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개성 있는 소설 콘텐츠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65세의 그녀, 조각을 100세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할머니라고 말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들어가는 노인의 캐릭터로서 그녀의 모습은 늙어가는 신체와 마음의 변화를 단면으로 보여준다. 

 

<파과>는 지금 뮤지컬로 준비되어 5월 26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무대에 올려지고 있었다. 배우 차지연과 구원영이 조각의 역할을, 신성록과 김재욱, 노윤이 투우 역을 맡는다고 한다. 책에서 느껴졌던 독특한 캐릭터들을 무대에서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편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오늘의 작가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한 구병모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 <한 스푼의 시간> <상아의 문으로>, 소설집 <고의는 아니지만>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단 하나의 문장> 등이 있다. 청소년 소설 <위저드 베이커리>는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5년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로 오늘의 작가상과 황순원신진문학상을 받았고, 김유정문학상과 김승옥문학상 우수상을 동시에 수상한 수록작 '니니코라치우푼타'는 중위 연령이 61세에 달하는 초고령 사회에서 두 모녀의 이야기를 통해 저출생과 고령화의 미래를 보여준다. 

 

올해 나는 두 명의 작가들에 대한 작품들을 많이 읽어볼 생각인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소설가 구병모이다.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는데, 구병모는 필명이다. 본명은 정유경, 여성 작가이다. 이 책 제목인 '파과'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것 같다. 그에 대한 답들은 고스란히 독자들의 몫으로 건네진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던져주고 있는 듯싶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p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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