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그 모든 아름다움/책 77

도둑맞은 공허와 권태, 소설가 정영문

도둑맞은 공허와 권태 소설가 정영문 #1 이탈리아의 어느 호텔. 한 남자가 창가에 앉아 거리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밖으로 고정된 그의 시선은 굳이 무엇을 찾고자 하는 목적도, 그 안에서 어떤 것을 읽어내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방에서 창문 밖 세상과의 대화만을 나누던 그가 3일 후 방에서 나왔다. 자신의 몸이 부딪히는 어느 곳에서도 그 존재감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2 1991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머물게 된 프랑스. 그리 넓지 않은 공원 안에 자리한 연못에서 여러 마리의 학이 보인다. 미동도 없이 하루 종일 학의 몸짓만 바라보고 있는 어느 키 큰 한국인. 사춘기 무렵, 자의식이 생겨나면서부터 한없이 느껴졌던 권태로움이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3 서울대 심리학과 시..

정형화된 이상화와 객관현실과의 규정력, 태백산맥

정형화된 이상화와 객관 현실과의 규정력 조정래 장편소설 중에서 역사적 구체성과 시대적 필연성을 중시하는 하위 장르는 역사소설이다. 장편소설이 대상의 총체성 확보를 지향한다면 역사적 진실을 그리지 않을 수 없으며, 아직 어느 것이 시대의 본질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동시대보다는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인식 가능한 과거사를 대상으로 택했을 때 목표에 도달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현재에 대한 재검토를 통하여 오늘의 '출구 없는 시대' 정세를 되짚어볼 수 있다는 데서도 역사소설의 현재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을 읽을 때, 나는 처음 그 명성에 비해 저으기 실망한 적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작품이 흥미롭게 읽히는 반면 기대했던 역사적으로서의 명분, 곧 전형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

우울한 시선으로 가장된 잔잔한 밝음, 파트리크 쥐스킨트 콘트라베이스

우울한 시선으로 가장된 잔잔한 밝음 파트리크 쥐스킨트 이미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으로 와 가 각각 1991년도와 그 이듬해에 초판 발행되었지만,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93년 3월 10일 초판 1쇄된 를 통해서였다. 나만의 세계에 빠져 철저히 의도된 주변인 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강의실에서 이름만 알고 지내던 동기 한 명이 내 생일 즈음에 책 한 권을 스윽 건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쥐스킨트의 작품이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하게 된 이유는 서점에서 이 책을 보는 순간 문득 내가 생각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는데, 왠지 그 말에 조금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나는 그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삼국의 역사를 말하는 진정한 맞수, 삼국사기 vs 삼국유사

삼국의 역사를 말하는 진정한 맞수 삼국사기 vs 삼국유사 삼국의 역사를 전해주는 와 는 언제나 서로 대비되는 진정한 맞수다. 전자의 저자인 김부식이 후자를 쓴 일연보다 130년 정도 전의 사람으로, 그들은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었으며, 당연히 책을 엮은 시기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를 떠올리면 가 생각나고, 김부식을 말하고자 할 때는 일연까지 함께 언급된다. 역사서의 라이벌, 언제나 서로 대비되다 근엄한 풍채가 상상되는 유학자 김부식과 민중과 함께 생활하는 괴짜였을 것 같은 승려 일연. 이 두 사람에 대한 인상이 판이하게 다른 것처럼, 와 의 내용 역시 대비된다. 사대적 역사인식과 자주적 역사인식, 유가적 내용과 불교적 내용, 정사와 야사, 사대부적 내용과 서민적 내용 등 두 권의 책 전반..

글은 나 자신과의 투쟁이다, 김영하

어느 시대에나 있어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용은 곧 인식의 낯섦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접근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무비판적인 거부의사와 더불어 어느 정도의 공존을 허용하는 양극 현상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동시대적 이미지를 넘어선다는 것은 곧 새로움에 대한 경계였으며, 결코 호의적이지 못한 예정된 탐색이었던 것이었죠 새로운 조류의 흐름은 또 다른 역사 창조를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현실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의 세계에서 또한 예외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욱더 높은 이상을 향해 끊임없는 도전을 던지고 있는 그들을, 1998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New Face라는 이름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문단의 화제가 된 소설가 김영하와 충무로에 출사표를 던진 영화감독 임..

길들여진 게임의 법칙

길들여진 게임의 법칙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생각들도 많은 혼란을 겪게 되었다. 형제애가 없는 무정한 형으로 매도되었던 놀부는 경제난을 겪고 있는 요즘 시대에 가장 현실적이며 이상적인 인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으며, 그에 비해 흥부는 자식까지 거느린 가장으로서 무능력한 전혀 책임감이 없는 형편없는 남편과 아버지로 비난받고 있다. 또한 매일 방 안에 앉아 '참을 인' 자를 써가며 울기만 했던 인현왕후보다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 보다 적극적이었던 장희빈이 현대의 활동적인 여성상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더욱이 아버지를 위해 바닷속으로 뛰어든 심청은 눈먼 아버지를 버린 채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했던 아주 나쁜 딸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강박관념은 바..

파벽에 반사된 고독한 질주 / 이상

파벽에 반사된 고독한 질주 이상 28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나의 회상은 멈추어져 있다. 스스로를 직시하고자 하는 허울만으로의 진실조차도, 더욱이 세상을 이탈하고자 하는 작은 고민마저 망각된 채 현실과 타협하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 살아 있는 나의 죽음, 그 안에서 침묵하고 있는 이상의 모습이 어렴풋히 스쳐 지나간다. 1937년 4월 17일. "레몬 향기가 맡고 싶소"라는 유언을 남긴 채 사라져 간 이상. 그는 현실과 이혼하지는 못했지만, 결혼 또한 이루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동거의 흔적은 조금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나 역사는 누구에게나 반보의 낯섦만을 허용할 뿐, 한 발의 도전은 가감 없이 매도해 버리기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였을까. 살아있는..

728x90
반응형